이타인(李他仁) 대 고정문(高定問) - 고구려 부흥전쟁 2
[고구려사 명장면-129]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삶을 전하는 문헌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근래에 중국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그 후손들의 묘지명이 20여 종 발견돼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당에서 수도 장안이나 낙양에 묻히고 더욱 묘지명을 남길 정도로 출신한 인물과 가문들이었으니, 대부분 고구려 멸망기를 전후로 당에 투항해 나름 부귀를 누린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의 변경 지방으로 강제 이주돼 고난을 겪었던 이른바 디아스포라인 대다수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어간 자들이다.
그러기에 이들 묘지를 통해 대다수 유민의 삶을 알기는 어렵지만, 고구려 멸망기에 문헌 자료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한 국가 및 공동체가 무너져 내릴 때 다양하게 표출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나칠 수 없는 자료이다. 고구려 유민 묘지 자료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리라 기대된다.
이들 유민 묘지명 중에서 책성(柵城)과 관련된 인물들의 활동을 전하는 게 있어 눈길을 끈다. '고자(高慈) 묘지명'과 '이타인(李他仁) 묘지명'이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은 아니지만 당의 관료로서 고구려 멸망 후 책성에 파견된 인물인 '양현기(陽玄基) 묘지명'이 또 다른 정보를 담고 있다. 책성은 지금 중국 훈춘시에 비정되는 고구려의 지방 도시로 두만강 하류 일대 지역을 통괄하는 동북방 최대의 거점이었다.
'고자 묘지명'은 전에도 잠깐 소개한 바 있는데, 고구려 후기 명문가의 후손으로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5년에 태어나 697년에 33세로 사망해 낙양 인근에 묻힌 인물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증조부 고무(高武)는 최고위 관인 막리지(莫離支)를 지냈으며, 조부 고량(高量)은 위두대형(位頭大兄)에 책성도독(柵城都督)을 지냈고, 아버지 고문(高文)도 위두대형으로 장군(將軍)을 겸했다고 한다. 위두대형은 고구려 관등 체계에서 5위에 해당하며 국가의 중요 업무를 처리하는 이를테면 각 부처의 장관급을 지낼 수 있는 관등이었다. 지방관으로는 가장 높은 관직인 욕살(褥薩)을 역임할 수 있었는데, 고량이 지낸 책성도독이 곧 책성의 욕살을 뜻한다. 아버지 고문이 겸한 장군직도 최고위 장군직에 해당할 것이다.
증조부 고문은 연령상으로 볼 때 연개소문의 조, 부와 같은 때에 함께 막리지를 지낸 인물이며, 조부 고량이 책성도독을 지낸 때도 연개소문 집권기와 겹칠 것이다. 연개소문과는 달리 고량이 아버지 막리지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또 고문 역시 아버지 고량의 책성도독을 세습하지 않은 현상은 장자(長子)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고자 가문의 위세가 다소 약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고량이 중앙 출신으로 책성의 최고 지방관을 지냈다는 점은 아래 이타인의 가문과 비교된다.
'이타인 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은 책주(柵州) 출신으로, 할아버지 복추(福鄒)는 대형(大兄)을 지냈고, 아버지 맹진(孟眞)은 대상(大相), 즉 태대사자(太大使者)를 지냈다. 이복추가 지낸 대형은 7위의 관등으로 위두대형 아래의 중간급 관등인데, 이맹진이 오른 태대사자는 3위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이타인 가문은 아버지 대에 지위가 급상승한 것이다. 이타인은 609년생(영양왕 20년)이기 때문에 아버지 이맹진의 활동 시기는 영양왕, 영류왕 대로서 아마 수와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워 크게 성장한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가문의 성세를 배경으로 이타인은 책주도독(柵州都督) 및 총병마(總兵馬)가 되어 고구려 영역 12주(州)를 주관하고, 말갈 37부(部)를 통솔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책주도독이 통솔하는 말갈은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백산말갈(白山靺鞨)로 보인다.
이타인이 책성 출신이라는 점에서 말갈족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 집안이 태대사자와 책주도독을 역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인임은 분명하다. 본래의 출신 종족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책성 일대에서 오래 기반을 다져온 고구려인으로 귀속 의식을 갖고 있는 가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문과 이타인은 서로 대비되는 인물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거의 같은 시기에 당군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 후 당에서 벼슬을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공격했다는 점이다.
'고자 묘지명'에 의하면 고자 아버지 고문은 고구려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형제를 데리고 당에 귀순하였다고 한다. 고문(高文)이라는 이름은 문헌 기록에 보인다. 648년(보장왕 7) 당 장군 설만철(薛萬徹)이 3만 당군을 이끌고 박작성(泊灼城)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오골성(烏骨城)과 안지성(安地城) 등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당군을 공격한 인물이다. 그런데 묘지명의 주인공 고자가 665년생으로서 아버지 고문은 이 무렵 30대였을 것이고, 648년에는 많아야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였을 것이니,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당군과 맞설 정도의 경륜은 아니라고 보인다. 따라서 동일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 당군에 투항했을 때 고문의 나이는 30대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타인 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 역시 나라가 망할 기미가 있음을 깨달아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당 이세적의 군영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타인은 당군의 선봉이 되어 석성(石城)을 공략하고 평양성 공격에도 참여했다. 여기의 석성은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백석성(白石城)을 가리킨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세적을 따라 당 조정에 들어가서 종3품인 우융위장군(右戎衛將軍)을 받았다고 한다. 668년 고구려 멸망 때에 이타인의 나이는 60세였다.
고문이나 이타인이나 고구려가 멸망할 것을 미리 알고 당군에 투항했다고 묘지명에 기록하고 있다. 물론 묘지명을 작성하는 상투적인 문장일 수도 있다. 이 두 사람이 당군에 투항한 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남생이 당에 투항하고 이를 계기로 667년 이후 당군의 대규모 고구려 정벌이 이루어지는 그 무렵일 것이다. 즉 남생이 당에 투항하는 등 중앙정권의 분열이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으며, 또 그만큼 당과의 전쟁에서 점점 무기력해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타인 묘지명'이 전하는 또 다른 역사상은 부여(扶餘)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부여에서 다시 저항이 일어나자 이타인은 왕명을 받아 부여에 가서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반란을 토벌하고 돌아왔고 그 공으로 우령군(右領軍)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우령군장군은 앞서 받았던 우융위장군을 670년에 개칭한 직이다. 이타인이 675년에 67세로 사망하였으니, 이를 통해 이타인의 부여 정벌이 670~675년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부여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거의 주목할 자료가 없었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670년 이후 부여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벌어졌음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책주도독을 지낸 이타인이 당군에 투항하고 당의 관리가 된 이후 책성 지역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다행스럽게도 그 편린을 전해주는 묘지명 자료가 '양현기(陽玄基) 묘지명'이다. 양현기는 661년 당의 고구려 원정 때 압록강 일대를 공격하다가 철군했던 글필하력 군대에 소속돼 활동하였고, 668년에는 동책주(東柵州) 도독부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 동책주는 곧 책성을 가리킨다. 그동안 두만강 유역의 책성 지역은 동북쪽 변경이라서 당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는데, 이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멸망 후 책성 지역에도 기미지배 체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책성 지역의 지배자인 이타인을 다시 책성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않은 점은 여러모로 생각해볼 문제이다.
어쨌든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기미지배 체제에 의해 동책주 지역에도 지방관은 고구려인이 맡고, 이를 감시·통제하는 자리에는 당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양현기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양현기 묘지명에는 수령 고정문(高定問)이 모반하여 이를 주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고정문은 이타인 투항 이후 책성 지역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고, 고구려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다가 양현기에 의해 진압당했음을 알려준다.
고정문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정보가 전혀 없어 아쉬울 따름이지만, 앞서 '이타인 묘지명'을 통해 부여 지역에서, '양현기 묘지명'을 통해 책성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중요한 역사상을 전해준다. 즉 고구려 영역 전역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구려 책주도독을 지내는 등 최고위 위치에 있었던 이타인은 당에 투항해 이제는 당의 장군이 되어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위치가 되었다. 남생이 안동도호가 되어 죽을 때까지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 부흥운동을 감시·통제하는 역할을 한 행위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남생과 이타인 같은 인물일수록 당에 대한 충성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자신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고문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고자 묘지명'에 의하면 고문, 고자 부자는 왕명을 받아 696년에 거란을 파하였고, 697년 5월에 도적의 공격에 포위되어 마미성(磨米城) 남쪽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고문 부자의 행적은 곧 696년 5월 영주에서 거란 이진충이 거병하자 이를 진압하는 당군에 참여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의 전사지인 마미성은 요동에 있는 고구려 성으로서 그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요동성 동쪽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문 부자는 영주를 탈출한 대조영 등 고구려 유민들을 추격하다가 마미성 일대에서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같은 고구려 유민들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요동 옛 고구려 땅에서 생사를 걸고 대결한 것이다.
고구려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자들과 고향 땅에서 고구려 부흥을 막으려는 자들의 서로 다른 길은 이미 고구려가 멸망할 그때에 정해진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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