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텁텁함을 씻어주는 무알코올 맥주를 아십니까?

한은형 소설가 2021. 1. 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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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아무튼, 주말] 무알코올 맥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운동 끝나고 마시던 맥주였다. 땀이 식지 않은 채로 요가복 위에 겉옷만 걸치고 다급하게 마시던 맥주. ‘다급하게’라는 부사어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땀이 식지 않은 채로 마셔야 했기 때문에 나는 더할 수 없이 다급했다. 땀으로 촉촉해진 정수리의 습기를 느끼며 마시는 맥주 맛이란···. 다 아실 줄로 안다.

맥주 맛을 가파르게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해왔다. 땀과 갈증과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안 받는 게 좋지만, 스트레스를 내 마음대로 받고 안 받고 할 수 없지 않나?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꾸역꾸역 무언가를 참았다가 마시는 맥주의 맛이란. 그 첫 모금의 맛이란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한 것이다.

'각별한 맥주집'과의 인연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맥주를 마시지 않는 건 아니다. 매일 마신다. 무알코올 맥주의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Pixabay

맥주를 마시기 위해 요가를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때 내게 ‘요가’란 곧 ‘맥주’를 가리켰다. 요가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 있던 ‘○○나무’의 맥주 맛이 각별해서 더 그랬다. 얼렸던 피처 잔에 콸콸 따라 주는, 그래서 맥주 거품도 반쯤은 언 것처럼 느껴지는 맥주였다. 게다가 동업자인 주인 내외는 서로를 볼 때마다 지긋이 웃음을 교환하는 분들이라 나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그런 건 연기할 수 없는 법이다. 30년은 같이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 부부가 저렇게 서로를 보면서 웃을 수 있다니, 저런 부부도 있나 싶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인내심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음 컵에 나오는 카스를 마시며 부부를 보고 있으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맥주 맛이 더 좋았다.

벌써 삼 년 전 일이다. 이사를 왔고, 요즘은 요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각별한 맥주 맛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시지 않는 건 아니다. 매일 마신다. 매일 저녁마다, 아니 점심에도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있다.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답답함을 푸는 데에 맥주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무알코올 맥주의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겨울밤 실내에 고여 있는 텁텁함을 씻어내는 데에 이토록 훌륭한 자가 처방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무알코올 맥주를 처음 경험한 곳은 베를린이었다. 5년 전의 베를린. 식당마다, 술집마다 꽤 많은 종류의 무알코올 맥주가 있었다. 술을 주문할 때 보면 다수의 맥주파와 소수의 와인파가 있었는데, 소수의 와인파보다 더 지분을 차지했던 게 무알코올 맥주파였다. 독일말로는 ‘알코올프라이 비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무알코올 맥주를 시켰다. 아니면 전날 과음했거나, 술로 인해 인생의 중대한 사건을 겪었거나 하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이제는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이 시켰다. 나도 무알코올파를 따라 몇 번 시키곤 했는데 별 기억이 없다. 곧, 라들러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라들러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맥주라고 했다. 라들러(radler)는 자전거라는 뜻. 라거에 레몬즙을 탄 도수가 낮은 맥주라며 한번 먹어보라는 말에 마셨다가, 줄창 라들러만 시키게 되었다. 자전거는 탈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정말이지, 베를린 사람들이 아침에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장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달리는 버스(나는 그 안에 있었다) 앞에서 두 발을 가열차게 움직여 달리고 있는 자전거 군단을 볼 때마다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사람의 체력인가?’라고 생각했다. 마력(馬力)에도 뒤지지 않을 거 같은, 아스팔트도 물엿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파워였다. 저런 스테미너라면 세상에서 못할 게 없을 것만 같았다.

라들러만 마시던 내가 이렇게 흘러 흘러 무알코올 맥주에 제대로 빠지게 되었다. 우연히 생겨 마셔 보았는데 왜 이제야 마셨을까 싶었다. 디카페인 커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런 불신의 대상이 되기에 무알코올 맥주는 너무도 정밀했던 것이다. 뭐 스위스 시계도 아니고, 무알코올 맥주에 정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홉의 냄새나 맛, 목구멍을 샥하고 할퀴는 느낌 등등이 맥주 그 자체였다.

무알코올 맥주라고 해서 무시할 게 못 되는 게 그래도 약간의 취기는 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망상이나 기대가 아닐까 싶었는데, 알콜 함유량이 0.5%였다. 맥주는 보통 5~6%고, 라들러가 2~3%라는 거에 비하면 우습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0.5%는 0%와는 엄연히 다르다. 사실, 내가 무알코올 맥주를 본격적으로 마시게 된 최초의 이유는… 금주를 선언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시적이긴 했지만 금지의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고,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무알코올 맥주를 마셨던 것이다.

좋은 것은 널리 알려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무알코올 맥주를 전도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군은 점심시간에 맥주를 마신다는 이야기다. 독일에서 복무한 미군과 군 생활을 함께 했다는 남자가 말해줬다. 그도 나를 따라 무알코올 맥주를 마시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독일군이 점심시간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군기가 해이해서도, 그곳이 맥주의 천국이어서도 아니고, 그 맥주가 무알코올 맥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알코올 맥주일 거야.”라고 말한 뒤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독일이 어떤 나란데···.” 그들의 가공할 만한 체력은 점심부터 알콜에 담가지기에는 너무도 투쟁적인 것이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1989년인가? 그때에야 아이슬란드에서는 맥주를 마시게 되었는데(이전에는 맥주를 마시는 게 불법이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맥주를 약간 마시고 엄청나게 취한다고 한다. 맥주를 약간 마시고 취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가능하다. 맥주 값이 엄청나게 비싸므로 아이슬란드인들은 취하지 않는 걸 견딜 수 없어한다고. 농담일지 진담일지 들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확실히 취하게 하는 맥주’를 원하는 아이슬란드에서 ‘무알코올 맥주’라는 장르는 발붙이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모르겠다. ‘어디 한 번 무알코올 맥주를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라며 기개를 펼치는 아이슬란드인이 없으리라는 법은 또 없으니까.

무알코올 맥주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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