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우리는 '유령 노동자'
"20년, 30년씩 일해도 신용카드 한 장 못 만드는 사람이 수두룩해요. 한 공장에서 몇십 년을 일해도 거기에 대한 증거가 없는, '유령' 같이 남아있는 거죠."
귀금속 세공사인 그는 한 장의 교통카드와 노란 월급 봉투를 옷 안섶에서 주섬주섬 꺼내 보였습니다. 종로3가에서 5가 사이 즐비한 500여 개의 귀금속 가공 사업장에서는 대부분 아직도 임금을 종이 봉투에 현금으로 담아 준다고 했습니다. 사업주들이 추적이 가능한 계좌 이체를 피하고자 쓰는 꼼수인데, 이 업계 관행입니다. 노동자들은 소득을 뒷받침할 기록이 없으니 신용카드 발급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귀금속 세공사들은 어쩔 수 없이 '티머니' 카드에 얼마씩을 충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 반짝이는 것에 가려진 '그늘진 노동'
2020년인 지금까지도 대부분 사업장에서 임금을 현금으로 주는 마당에 이들에게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은 딴 나라 얘기였습니다. 2018년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종로·중구 귀금속 사업체 기준으로 고용보험에 가입된 사람은 7천635명 가운데 1천849명이었습니다. 10명 중 3명도 채 안 됐습니다. 산재보험과 의료보험, 국민연금 같은 나머지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사람도 대다수입니다. 이 동네에선 사업주에게 4대 보험에 가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찍히게' 됩니다. 심지어 일부 사업주들이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 4인까지만 4대 보험을 신고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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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sbs.co.kr/d/?id=N1005803293 ]
● '있는 법부터 지켰으면'…고용노동부의 책임
물론 모든 귀금속 세공 사업장의 사정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아닙니다. 취재를 위해 찾았던 한 주얼리 업체는 이미 20년여 전부터 직원 50명의 4대 보험을 100% 가입했습니다. 이 업체 대표는 직원들의 복지와 재교육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그래야 우리나라 주얼리 산업도 세계적인 귀금속 가공 산업을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비첸자'(Vicenza)처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귀금속 세공 기술력과 디자인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한국의 귀금속 산업이 대표적인 도심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거듭나려면 '사람에 대한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종로의 소규모 사업장들의 노동 시계는 여전히 70년대에 멈춰있습니다.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만연한 4대 보험 미가입과 근로기준법도 지켜지지 않는 환경에서 일하는 주얼리 노동자들을 떠올리면, 반짝이는 보석들이 마냥 아름답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보이지 않는 사람들
대통령까지 나서서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지만, 이미 의무가입 사업장에서 수십 년째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주얼리 노동자들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고용노동부의 주얼리 사업장 실태 조사 이후에도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일하는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겁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의 시작은 의무가입 사업장의 가입률부터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합니다. 불법과 편법을 명확히 감독해야 할 고용노동지청이 손 놓고 있다면, 보석을 만드는 이들의 아름다운 노동은 앞으로도 빛바랜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4대 보험은 딴 나라 얘기…해고 위협받는 '유령 노동자' (지난 21일, SBS 8뉴스 리포트)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799501 ]
제희원 기자jess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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