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대묘 깊이 보기 1 - 산악도
[고구려사 명장면-72] 전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하여 고구려 벽화고분 다수를 조사하였다. 평양 체류 기간 일주일 내내 쉼 없이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기에 어느 하루도 흥분과 감동이 수그러든 날이 없었다. 그런 긴장감은 필자 평생에 다시는 없을 일이었다. 평양 조사 일정 4일째에 마침내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강서 삼묘를 찾아갔다.
강서 삼묘는 무학산에서 흘러내린 낮은 구릉을 살짝 거리를 두어 등지고 있고, 사방으로 너른 들을 끼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치 양택의 명당 자리를 골라 음택을 마련하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강서 삼묘의 가장 앞자리에 대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강서 대묘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널방은 방형으로 남북 길이 3.17m, 동서 길이 3.12m, 높이 3.51m 규모였다. 지난 회에서 강서 대묘의 널방이 매우 조화롭고 이상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비례를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 필자는 실제 강서 대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으로 그 탁월한 공간감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널방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석 두세 장을 잇대어 쌓았고 맨 윗단은 안으로 살짝 기울어지게 다듬었다. 벽과 천장이 만나는 네 모서리에는 삼각형을 잇댄 형태의 5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끼워 넣어 경직되어 보이기 쉬운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하였다. 이 부분이 내부 방형의 사방 공간을 일체감으로 연결하는 시각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널방의 공간 처리가 매우 섬세하게 설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천장은 받침돌이 벽면보다 약간 안쪽으로 나오게 2단을 평행으로 올려 쌓고 그 위에 모줄임 방식으로 삼각고임돌을 2단으로 얹어 축조하였다. 천장 각 단의 고임돌 역시 살짝 기울임을 주었기 때문에 널방의 공간에서 직선의 경직성이 한결 줄어들었다. 바닥에는 잘 다듬은 두 개의 관대가 동서 양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덤의 널길은 널방 남벽 중앙에 냈고, 널방 입구에는 두 짝 문을 달았던 문확 자리가 남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부 벽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유리벽을 사방으로 둘렀는데, 이 유리벽 때문에 널방의 공간감을 금방 느끼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시선과 머릿속에서 이 유리벽을 제거하는 상상력을 다소 발휘해야 그 완벽한 공간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리벽 때문에 시선에 차단이 있어 벽화를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북측 관계자는 사진 촬영자 외에는 유리벽 안으로 들어가기 곤란하다고 했다. 물론 벽화를 보존하려는 그 뜻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던가. 여기서 유리벽 너머로 보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 관계자에게 30여 년 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열정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숱하게 떠올렸던 모든 이미지를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하는 데는 충분하였다. 구석구석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이른바 안광을 스스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차적 관심은 의당 사방 벽면의 사신도였지만, 어느 새 모줄임 고임돌의 다양한 입체면에 그려진 그림들의 다채로움에 내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의 고임돌 옆면에는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띠를 두른 듯 이어져 있고, 제2단 고임돌 옆면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 선인상, 산악도 등이 서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단, 4단의 고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신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이들 여러 단 고임돌의 아랫면에도 인동초롱무늬, 연꽃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맨 위 사각형 천장돌에는 둥근 원을 그리며 꿈들거리는 황룡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강서 대묘의 널방은 천장의 황룡부터 사방 벽면의 사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림이 신비스럽고 비현실적인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 중에서 유독 현실 세계를 묘사한 듯이 사실적인 그림이 몇몇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산악도(山岳圖)다.
천장 고임돌에 2종의 산악도가 그려져 있다. 하나는 4개의 신봉우리가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좌우로 다소 낮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앞에 작은 산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앞뒤로 겹치면서 3~4층의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삼각형 모습의 윤곽선 안쪽으로 농담을 넣어 산의 입체감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면 자체에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
더욱 고임돌의 중간까지만 산을 그리고 그 위로 너른 여백을 두어 마치 하늘을 넓게 담은 듯한 한 폭의 풍경화 분위기를 듬뿍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현실세계의 산악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매우 사실적인 산악의 묘사는 천상의 산이라기보다는 지상의 산임을 느끼게 한다. 이 산악도는 마치 천상과 지상을 나누는 경계에 있는 존재인 듯하다.
또 다른 산악도는 다소 가늘게 우뚝 솟은 둥근 산봉우리가 좌우로 뾰족한 산봉우리를 끼고 있는 모습이다. 각 산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오른 형상이 마치 인간의 염원이 충만되어 솟구치는 듯한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우측 산에서는 붉은 줄기에 녹색의 잎이 무성한 낙락장송 같은 그림이 하늘까지 꿋꿋이 서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왕의 상징인 일월오악도 그림 좌우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우주목을 연상케 한다. 이 나무 그림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들 천장 고임돌의 산악도와 달리 남쪽 벽의 동서 주작도 아래에도 또 한 폭의 산악도가 펼쳐져 있다. 동서 주작도 아래의 산악도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으로 굵은 붓질로 삼각 모양으로 높고 낮은 산을 좌우로 펼치고 앞 귀로 겹쳐서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산은 붉은색을 칠하여 마치 불타는 화염산처럼 느껴지는데, 붉은 선 아래는 흰색으로 받쳐서 불길을 살짝 죽인 듯하다. 전체적으로 표현 방식은 천장 고임돌의 산악도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바로 산악도 위에서 거대한 형상으로 날고 있는 주작의 신비로움을 더하는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 산악도가 이웃해 있는 강서 중묘의 널방 북쪽 현무와 함께 있는 산악도다. 이 산악도 역시 산의 능선 표현에 윤곽선을 따라 농담의 표현이 있고 그 안쪽으로 약간 담채를 넣어 입체감을 드러낸다. 현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듯한 곳은 나지막하게 그리고, 현무 좌우 양쪽에 불쑥 솟아서 마치 현무를 살짝 감싸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여러 겹 이어져 산맥처럼 보이는 산세의 모습은 기암괴석과 같이 울퉁불퉁하고 각이 지고 굴곡져 있어 현실의 산세라기보다는 다소 신비스럽고 기이한 세계를 보여준다. 더욱이 그 위에 현무가 움직이고 있어서 마치 현무의 운동감이 산악의 기이한 형태에 조응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더욱더 현무를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다.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 벽화에서 보이는 이런 사실적인 산악의 표현은 앞선 시기 벽화에 보이는 산악도와는 매우 다르다. 무용총 수렵도에 보이는 산악도는 구불구불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고, 약수리벽화 수렵도에 보이는 산악도는 그릇을 엎어 놓은 도안적인 형태다. 게다가 이들 산악도는 수렵하는 장면에서 하나의 배경으로만 기능하고 있음에 반하여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의 산악도는 독립된 제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강서 대묘의 주작도와 강서 중묘의 현무도 아래에 그려진 산악도조차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독립된 산악도로서 독자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인 산악의 표현 방식이나 제재의 새로운 성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회화적 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는 고구려인 생각의 진전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추론하자면 이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산악의 모습은 고구려인들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산천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6세기 말~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에 이런 산악도가 담기게 된 것은 수나라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인들이 자신들 삶의 무대에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된 결과라고 이해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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