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묘'와 강서3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구려사 명장면-70] 평양 일대 고구려시대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은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이다. 기단부 한 변 길이가 약 54m이고, 높이는 약 12m로, 평양 일대의 고구려 석실봉토 무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이런 거대한 규모로 인해 예부터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皇帝墓)'로 전해왔다.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의 크기를 보면 한 변 길이 32m, 높이 12.4m이다. 장군총과 더불어 광개토왕릉의 후보로 꼽히는 태왕릉은 한 변 62~68m, 잔존 높이 14m 정도이다. 이 두 고분과 비교하면 이 경신리1호분은 장군총보다는 훨씬 크고, 태왕릉에 다소 못 미치는 규모이니, 석실봉토분으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큰 고분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독자들께서 규모만을 어림짐작하려면 경주의 신라 서악동 고분들과 비교해 보면 좋을 듯하다. 물론 경신리1호분은 봉분 기단이 방형이고 경주 서악동고분은 원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서악동 3호분이 높이 12m, 직경 60m이고, 4호분이 높이 10m, 직경 51m 정도이니 서로 견줄 만한 크기라고 하겠다.
경주의 서악동 고분들은 무덤 규모가 초대형인 왕릉급인데, 무열왕릉 뒤편 능선에 위아래로 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혈연적으로 서로 이어지는 무열왕 직계 조상 왕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龍春), 즉 문흥대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경신리1호분은 그 규모 외에도 형태 및 출토 유물에서 눈길을 끄는 점이 많다. 전동명왕릉과 마찬가지로 하단에 방형의 석축 기단을 두르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형태이다. 이 석축 기단부가 고분의 웅장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도 있다. 이러한 방형 석축 기단부는 장군총과 같은 적석무덤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동명왕릉과 마찬가지로 평양 천도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고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신리1호분에서는 연꽃무늬 와당과 다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와당은 대략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무덤에 와당과 기와가 왜 필요했을까. 국내성에 있는 장군총이나 태왕릉, 천추총에도 와당과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국내성 시대의 왕릉급 적석총과 유사한 시설이 경신리1호분에도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무덤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관련된 시설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많지만, 무덤 석실 내부로 빗물 등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평양 지역 석실봉토분 중에서 이런 와당과 기와를 덮는 시설이 확인된 사례는 경신리1호분이 유일하다. 이 점에서도 평양 천도 이후 국내성 시대의 고분 양식을 잇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세기 후반인 와당의 제작 연대와 고분의 조영 시기가 일치한다고 보면 이때 만들어질 수 있는 왕릉은 유일하다. 바로 490년에 사망한 장수왕이다.
전 회에서 평양의 '전동명왕릉'이 건국지인 졸본에 있는 '장군묘'와 더불어 장수왕이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왕실의 위엄와 정통성을 과시하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건립한 동명왕릉임을 추정하였다. 그동안 전동명왕릉은 장수왕릉의 가장 유력한 후보의 하나였기에,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장수왕의 무덤은 달리 찾아야 하는데, 바로 경신리1호분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다.
그리고 일제 시기 조사 때에는 경신리1호분에 벽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78년 조사 과정에서 벽화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규모, 국내성 시기 적석총 왕릉의 전통을 잇는 방형 기단과 기와 시설물, 무덤방의 벽화 등으로 보아 경신리1호분은 평양 천도를 실행하고, 평양 지역에 묻힌 첫 번째 군주인 장수왕의 왕릉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다.
다음 왕릉급 고분으로 비정할 수 있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강서3묘라고 불리는 3기의 무덤 주인공에 대해 살펴보자. 강서3묘는 전동명왕릉이나 경신리1호분과는 외형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적석총 왕릉의 전통을 잇는 석축기단부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평양에서 왕릉의 형태가 점차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며, 전동명왕릉이나 경신리1호분 외에 석축기단이 있는 토포리대총이나 호남리사신총보다도 뒷 시기에 조영되었음을 뜻한다.
이 강서3묘, 즉 3기의 무덤은 그 규모에서 왕릉급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다소 크기 차이가 있어서 대묘, 중묘, 소묘로 이름 붙였다. 대묘가 가장 앞에 위치하고 그 뒤에 중묘와 소묘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무덤 규모를 보면 대묘는 봉분 아래 지름이 51.6m, 높이 8.86m이며, 중묘는 지름 45.45m, 높이 7.78m이고, 소묘는 지름 40.90m, 높이 6.8m 정도이다. 앞서도 살펴본 경주에 있는 신라 서악동고분 중 제1호분이 지름 39m, 높이 8m, 제2호분이 지름 40m, 높이 8m이니, 강서3묘 중 가장 작은 소묘의 규모와 엇비슷하다. 따라서 소묘 역시 왕릉급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고분 내부 석실의 양상은 다소 차이가 있다. 일단 강서 대묘와 중묘는 매우 화려한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데 반하여, 강서 소묘에는 벽화가 없다. 그래서 소묘를 왕릉급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덤 내부 석실의 규모를 보면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즉 석실의 크기를 보면 강서대묘는 길이 3.17m, 너비 3.12m, 높이 3.51m, 중묘는 길이 3.23m, 너비 3.9m, 높이 2.5m 인데, 소묘도 길이 3.35m, 너비 3.49m, 높이 3.03m로 거의 차이가 없다.
봉분의 규모나 석실의 크기를 볼 때 소묘가 대묘나 중묘에 비해 무덤을 만드는 데 들인 공력이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겠다. 즉 벽화가 있고 없음이 왕릉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은 왕릉이라는 점에서 어떤 정치적 사정을 우선 고려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3기의 고분이 한곳에 삼각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는 점이다. 왕릉급으로 비정되는 고구려 고분 중 이렇게 2기 이상이 모여 있는 경우는 없다. 국내성 시기 이래 고구려 왕릉은 독자적인 능역을 갖고 독립적으로 조영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경신리1호분이나 토포리대총, 호남리사신총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앞뒤로 나란히 조영된 신라 서악동고분의 경우도 무열왕과 그의 직계 혈통 왕들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강서3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공들은 매우 가까운 혈통일 것이다. 그중 대묘가 그 뒤에 중묘와 소묘를 나란히 거느린 형상을 고려하면 아버지(대묘)와 두 아들(중묘, 소묘)의 관계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3형제 관계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고구려 후기에 부자 및 형제 관계로서 3사람이 모두 왕인 경우가 있을까.
부자 관계의 경우라면 평원왕과 그의 두 아들, 영양왕과 영류왕을 상정할 수 있다. 형제 관계라면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을 상정할 수 있다. 대양왕은 영양왕, 영류왕의 동생이며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버지로서 보장왕 즉위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이 두 경우 외에는 달리 3기의 왕릉을 구성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두 경우 중 어느 게 정답일까. 현재로서는 어느 경우가 더 타당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강서대묘를 기준으로 볼 때 여기에 묻혔을 두 인물, 즉 평원왕 사망년이 590년이고, 영양왕 사망년이 618년으로 불과 28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재의 연구 수준으로는 이런 정도로 정교하게 고분 조영 연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분 내부 벽화 등을 고려하면 좀 더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회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다만 벽화가 없는 소묘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여기서 좀 더 짚고 넘어가야겠다. 같은 왕릉급으로 조영되었음에도 대묘와 중묘와는 달리 소묘에만 벽화가 없다는 점은 벽화를 그리지 못할 어떤 정치적 사정이 우선 고려될 수 있겠다.
따지고 보면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 두 경우를 모두 합쳐도 강서3묘 무덤의 피장자의 후보는 평원왕과 그의 아들인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 모두 4인에 불과하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은 영류왕이다. 영양왕의 동생인 영류왕은 수양제의 침공 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살해되어 시신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 도랑에 버려졌다고 한다.
문헌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이제는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합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했을지라도,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에는 선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봄 직하다. 다만 위 이야기는 영류왕릉이 왕릉으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였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벽화가 그려지지 않아 대묘, 중묘에 비해 왕릉급 요소가 다소 결여되어 있는 소묘의 주인공을 영류왕으로 비정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소묘를 영류왕릉으로 비정하게 되어도 대묘와 중묘의 주인공은 평원왕(대묘), 영양왕(중묘)으로, 아니면 영양왕(대묘), 대양왕(중묘) 두 경우 모두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 영류왕이 비록 비참하게 살해되었을지라도 왕릉의 예로 묻혔다고 한다면 무덤 내부도 왕릉의 온전한 격식에 맞게 벽화가 그려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벽화가 없는 소묘를 대양왕 무덤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즉 추존은 어디까지나 추존이기 때문에 왕릉의 격식을 완전히 갖추어 조영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영양왕(대묘), 영류왕(중묘), 대양왕(소묘)으로 비정된다.
아니면 영류왕의 경우 위의 기록대로 시신이 함부로 버려져서 아예 제대로 된 능묘를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강서3묘는 영류왕을 제외하고 평원왕(대묘)과 영양왕(중묘), 대양왕(소묘)으로 비정될 수 있다.
앞서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는 반면에 강서3묘는 적지 않은 고분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겨우 후보 왕 4인 중에서 3인을 비정하는 다양한 경우를 추정할 수 있고, 그중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역사 사실을 밝히는 실증의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음을 강서3묘의 피장자 탐구 과정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실증을 무시하고 상상력만으로 섣부르게 역사를 구성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상상력마저 사료에 기초하여 합리적 추론을 거치는 역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다면 그 결과물은 결코 '역사'와 '사실'이 될 수 없다. 픽션과 허구일 뿐이다. 그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게 역사 탐구의 첫걸음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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