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 조선시대 탕평을 무너뜨린 질문, "너의 DNA는?"

유성운 2018. 12.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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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 때의 정치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단연 ‘탕평’입니다. 경전 해석부터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까지 학문적·정치적으로 갈라져 있는 집단들을 묶어 ‘협치’를 이룬다는 것은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탕평의 틀을 닦은 영조의 속을 가장 끓이게 한 것은 노론, 그중에서도 성리학의 정통이라 자부한 호론(湖論)계였습니다. 왕이 직접 부르고, 벼슬을 내려도 호론계의 주요 인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학정(學政) 일체 사회였습니다. 학계의 가장 큰 세력인 이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탕평은 ‘앙꼬없는 찐빵’에 불과할 뿐이죠. 호론은 왜 이토록 탕평에 시큰둥했을까요.

부왕인 영조와의 갈등 끝에 비극적으로 숨진 사도세자 얘기를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중앙포토]


세계사적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간 조선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사회였습니다. 2000년 전 소멸한 주나라의 모습을 다시 구현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그랬지만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더 강화됐다는 점에서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적으로 이 시기는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거친 뒤 근대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산업혁명의 태동이 움트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였던 소수서원의 입구. 1542년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소수서원은 크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 영역과 학문을 갈고닦는 강학 영역으로 나뉜다. 소수서원 입구에 놓인 정자 '경렴정'은 공부에 지친 유생들을 위한 공간이다.
일각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무능하고 무력한 실체를 들킨 양반층이 사회적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질서 강화를 시도했다고 설명합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나 할까요. 그런 원인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선 당시 민란이 일어났거나 기존 질서를 뒤집고자 하는 대규모 저항의 조짐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다릅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어디서도 조정이 우려할만한 민란의 조짐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도중에 ‘이몽학의 난’ 정도가 일어났는데 이 반란의 주체는 피지배계층이 아니라 동인계에 속한 양반들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호응이 적어 금방 진압됐죠.
1636년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중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성리학 최후의 보루'라는 강박
조선의 특이한 행보에는 명나라의 멸망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한낱 오랑캐(여진족)가 천조(天朝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의 주인이 됐다는 것에 조선 지배층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위기감에 휩싸였습니다.
여기서 조선의 진로가 정해졌습니다. 성리학자들이 볼 때 이제 조선은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성리학의 보루였고,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명나라 몫까지 다해 성리학의 옳은 도리를 후세에 전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자각이 생겨났습니다. 중화(中華)라는 것은 중원의 땅을 차지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누르하치와 황태극이 건설한 심양황궁의 대정전 뜰.대정전은 여진족 군대의 팔기(八旗)를 상징하는 팔각전이고 좌우의 십왕정(十王亭)은 들판에 세운 군영처럼 간소해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준다.그러나 이 곳은 조선의 사신들이 봉변을 당한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중앙포토]

이에 따라 그동안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남녀 균분 상속이나 여성의 재혼 등은 제한됐고, 명나라를 복수를 갚겠다는 ‘북벌론’이 최대 정치적 어젠다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왕과 대비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몇 년간 입을지를 놓고 정치권이 두 패로 나뉘어 피를 부른 ‘예송논쟁’도 이무렵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놓고 둘로 나뉜 노론
이런 흐름을 주도한 건 서인계에서 분화된 노론이었습니다. 그런 노론도 18세기 ‘호락논쟁(湖洛論爭)’을 거치며 둘로 쪼개졌습니다. 1709년 노론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곧 ‘충청 노론 vs 서울 노론’의 구도로 재편됐고, 호락논쟁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호(湖)는 기호ㆍ호서(충청)지역, 락(洛)은 낙양, 즉 서울 지역을 가리킵니다.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되어 하늘로부터 고르게 덕성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보다 덕성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 정도만 다를 뿐이다.” (이간)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됐지만, 기질(氣質)에 따라 근본이 제각각 다르다.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같은 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원진)
퇴계 이황이 1568년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성학십도는 구원의 도정을 열 장 그림에 담았다는 의미 [연합뉴스]

이간의 입장은 인물성동(人物性同)-성범심동(聖凡心同)으로 연결됩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성인과 범인(凡人)도 본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강조한 입장입니다. 이를 지지한 낙론계는 대륙의 주인이 된 청나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봤고, 엄격한 신분제를 완화해 성리학적 질서에 녹일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반면 한원진이 말하는 인물성이(人物性異)는 성범심이(聖凡心異)로 이어집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다르며, 성인과 범인도 기본적으로 기질이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보편성보다는 차별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에 무게를 둔 호론 측은 성인과 범인, 오랑캐와 중화, 양반과 천인, 적장자와 서얼 등의 차이를 부각하고,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이런 균열을 인정했다간 성리학의 보루인 조선마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영부사 송시열의 초상 [중앙포토]

양측 모두 송시열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그래도 호론 쪽이 보다 송시열의 주장을 순수하게 지키는 쪽이었습니다. 청나라에 대한 인식만 봐도 그렇습니다. 송시열은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북벌론'을 주장했지만 낙론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창협은 ‘정통론’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정통에서 정은 '사정(邪正)의 정'이 아니라 '편정(偏正)의 정'의 의미이니 구역의 넓고 좁음으로 말할 따름이다…선악·화이를 가릴 것 없이 천하를 하나로 한 자가 곧 정통이니 이외에 다른 논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김창협, 『삼연집(三淵集)』 中)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조선의 소중화(小中華) 사상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호론 측 입장에서 보면 낙론은 배신자이자 타락한 사이비에 불과했습니다.
아스트로라베(Astrolabe) 별의 위치와 시간, 경도와 위도를 관측하는 휴대용 천문기구. 조선 후기 제작.


비타협적 호론, 탕평을 거부하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건만 낙론과 호론은 어느덧 섞이기 어려운 물과 기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때로는 다른 종교보다 같은 종교 안에서 서로를 이단시하는 종파 간 갈등이 더 심각할 때가 있는데 호론과 낙론의 관계도 이에 못지않았습니다.
“성범심과 인물성을 두고 호론과 낙론이 서로 싸워 시비를 산처럼 벌여놓으니 나뉘고 또 나뉘고 갈라지고 또 갈라졌습니다. 창을 들고 검을 쥐고서 아웅다웅 싸우니 피투성이가 되지 않는 게 그나마 행운이랄까요.” (홍직필, 『매산집』 中)

노론 낙론계의 영향을 받은 연암 박지원
영조는 난감해졌습니다. ‘사이비’들과 손잡고 정치를 할 수는 없다는 호론 측이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론으로선 '정통'이라는 판정을 내려주길 바랐지만, 영조로서는 심혈을 기울인 탕평이 무너질 수도 있는 만큼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고, 행여나 그런 '시험'에 빠질 상황이 오면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특진관(特進官) 서지수가 나아와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사람과 물건은 본성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전에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내어 의제(疑題)로 삼았던 것입니다. 권상하는 이것을 다르다고 하였고, 김창흡과 이재는 이것을 같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문의(文義)를 가지고 싸우게 하고자 하는가? 나는 유생(儒生)들이 나에게 다투는 것을 결판하여 달라고 할까봐 두렵다'하고 사직(司直) 서지수를 파직시켰다." (『영조실록』 34년 9월 5일)
세종실록 125권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원래 봄으로 예정됐던 과거 시험을 가을로 미루게 된 과정이 설명돼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시간이 흐르며 호론 측 인사들도 점차 정계로 진출했지만, 성리학적 순수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조 시대에 호론계 인사들은 ‘벽파’를 구성해 정조에 적극 협력한 남인, 소론, 노론 시파(낙론계)를 견제하는 역할에 앞장섭니다. 서학 등 서양문물 수용에 대해서도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지금 시각에서 보자면 낙론계가 시대 흐름에 조금 더 맞을 수도 있지만, 당시 시각에선 호론도 혼란한 시대에 대한 진단과 해결방안을 내놓기 위해 고심한 지식인 층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회유나 관직 제수를 뿌리치며 이념과 철학을 지키고자 했던 태도에선 훗날 의병활동이나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호론 측 지식인들의 기개를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단발령과 항일 의병.[사진제공=독립기념관] <
하지만 이런 도덕적 우월감은 적과도 타협해야 하는 정치 세계와 좋은 짝이 되긴 어려웠습니다. 결국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파국이 찾아왔습니다.
벽파는 어린 왕(순조)을 대신해 왕실의 최고 권력자가 된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후원을 업고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동안 '탕평'으로 묶여 있었던 남인과 소론, 낙론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배신자' 노론 시파를 비롯해 남인이나 소론 같은 '사이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에 가까웠던 왕실 종친(은언군)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광해군 시절 북인은 중앙권력의 독점으로 만족했지만, 이때는 그야말로 씨를 말리겠다는 철저한 탄압으로 이어져 수십 년 전의 언행까지 꼬투리가 잡혀 그야말로 줄초상이 났습니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 우리가 아는 정조 시대를 수놓은 유명 인사는 대개 이때를 계기로 정계에서 사라지거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상대와의 공존 가능성 자체를 뿌리뽑고자 했던 이 같은 숙청은 권력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도덕적 우월감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정약용[사진 중앙포토]
하지만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로 다시 정권이 뒤집혔을 때 돌아온 시파는 똑같이 방식으로 복수에 나섰고, 벽파는 이때 중앙정계에서 영원히 축출됐습니다. 양측이 벌인 피의 복수극은 공멸을 불렀을 뿐입니다.
10년 전 정치부에 배치돼 출입처였던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을 처음 접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성의 균질성이었습니다. 의원부터 보좌진까지 'OO대 총학생회' 혹은 '전대협' 혹은 '한총련' 등에서 굵직한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각에선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갇힌 섬’과 같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자존감은 높았습니다.
군사정권의 회유나 탄압에 굴하지 않고,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고 정통 야당의 길을 지켰다는 ‘혈통적’ 자부심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꺼내 들었을 때 열린우리당 내에서 격렬한 반발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영화 '1987' 속 시위 장면. [사진 '1987' 스틸컷]

지금의 민주당은 당시와 비교하면 외연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학생운동 지도부뿐 아니라 IT 전문가, 대형어학원 오너 등 여러 곳에서 인재들이 충원됐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중도층의 지지까지 획득해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창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석수가 부족해 야당의 협조 없이는 개혁법안의 처리도 어렵고 이런 환경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를 강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 내부에서 주요 정국마다 도덕적 우월성을 내비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면 협치의 가능성은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도 듭니다. 여당 대표가 '보수 궤멸'을 말하거나 사찰 의혹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이 'DNA'를 강조하며 일축할 때입니다.
2018년 1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의 영화 ‘1987’ 관람에 동행한 우상호 의원(좌에서 두번째). [중앙포토]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는 혈통(DNA)에 대한 자부심은 정치적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자부심이 도덕적 우월감으로 바뀌고, 외부로 드러날 때는 오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런 우월감이 권력과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애써 묶었던 협치의 탕평 정국을 붕괴시킨 것은 외부의 침입이나 역적의 준동이 아니라 바로 집권세력의 도덕적 우월감이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경구 『호락논쟁을 통해 본 철학논쟁의 사회정치적 의미』·『조선, 철학의 왕국』, 허태용 『호락논쟁은 어떻게 계승된 것인가 - 사상 계보 그리기의 어려움』, 조성산 『18세기 호락논쟁과 노론 사상계의 분화』·『17세기 후반~18세기 초 김창협·김창흡의 학풍과 현실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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