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 조선시대 탕평을 무너뜨린 질문, "너의 DNA는?"
영·정조 때의 정치적 특징이라고 한다면 단연 ‘탕평’입니다. 경전 해석부터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까지 학문적·정치적으로 갈라져 있는 집단들을 묶어 ‘협치’를 이룬다는 것은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탕평의 틀을 닦은 영조의 속을 가장 끓이게 한 것은 노론, 그중에서도 성리학의 정통이라 자부한 호론(湖論)계였습니다. 왕이 직접 부르고, 벼슬을 내려도 호론계의 주요 인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학정(學政) 일체 사회였습니다. 학계의 가장 큰 세력인 이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탕평은 ‘앙꼬없는 찐빵’에 불과할 뿐이죠. 호론은 왜 이토록 탕평에 시큰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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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적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간 조선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사회였습니다. 2000년 전 소멸한 주나라의 모습을 다시 구현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그랬지만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더 강화됐다는 점에서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적으로 이 시기는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거친 뒤 근대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산업혁명의 태동이 움트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어디서도 조정이 우려할만한 민란의 조짐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도중에 ‘이몽학의 난’ 정도가 일어났는데 이 반란의 주체는 피지배계층이 아니라 동인계에 속한 양반들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호응이 적어 금방 진압됐죠.
'성리학 최후의 보루'라는 강박
조선의 특이한 행보에는 명나라의 멸망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한낱 오랑캐(여진족)가 천조(天朝 명나라)를 대신해 중원의 주인이 됐다는 것에 조선 지배층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위기감에 휩싸였습니다.
여기서 조선의 진로가 정해졌습니다. 성리학자들이 볼 때 이제 조선은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성리학의 보루였고,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명나라 몫까지 다해 성리학의 옳은 도리를 후세에 전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자각이 생겨났습니다. 중화(中華)라는 것은 중원의 땅을 차지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남녀 균분 상속이나 여성의 재혼 등은 제한됐고, 명나라를 복수를 갚겠다는 ‘북벌론’이 최대 정치적 어젠다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왕과 대비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몇 년간 입을지를 놓고 정치권이 두 패로 나뉘어 피를 부른 ‘예송논쟁’도 이무렵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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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놓고 둘로 나뉜 노론
이런 흐름을 주도한 건 서인계에서 분화된 노론이었습니다. 그런 노론도 18세기 ‘호락논쟁(湖洛論爭)’을 거치며 둘로 쪼개졌습니다. 1709년 노론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곧 ‘충청 노론 vs 서울 노론’의 구도로 재편됐고, 호락논쟁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호(湖)는 기호ㆍ호서(충청)지역, 락(洛)은 낙양, 즉 서울 지역을 가리킵니다.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됐지만, 기질(氣質)에 따라 근본이 제각각 다르다.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같은 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원진)
이간의 입장은 인물성동(人物性同)-성범심동(聖凡心同)으로 연결됩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성인과 범인(凡人)도 본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강조한 입장입니다. 이를 지지한 낙론계는 대륙의 주인이 된 청나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봤고, 엄격한 신분제를 완화해 성리학적 질서에 녹일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반면 한원진이 말하는 인물성이(人物性異)는 성범심이(聖凡心異)로 이어집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다르며, 성인과 범인도 기본적으로 기질이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보편성보다는 차별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에 무게를 둔 호론 측은 성인과 범인, 오랑캐와 중화, 양반과 천인, 적장자와 서얼 등의 차이를 부각하고,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이런 균열을 인정했다간 성리학의 보루인 조선마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양측 모두 송시열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그래도 호론 쪽이 보다 송시열의 주장을 순수하게 지키는 쪽이었습니다. 청나라에 대한 인식만 봐도 그렇습니다. 송시열은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북벌론'을 주장했지만 낙론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창협은 ‘정통론’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정통에서 정은 '사정(邪正)의 정'이 아니라 '편정(偏正)의 정'의 의미이니 구역의 넓고 좁음으로 말할 따름이다…선악·화이를 가릴 것 없이 천하를 하나로 한 자가 곧 정통이니 이외에 다른 논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김창협, 『삼연집(三淵集)』 中)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조선의 소중화(小中華) 사상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호론 측 입장에서 보면 낙론은 배신자이자 타락한 사이비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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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협적 호론, 탕평을 거부하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건만 낙론과 호론은 어느덧 섞이기 어려운 물과 기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때로는 다른 종교보다 같은 종교 안에서 서로를 이단시하는 종파 간 갈등이 더 심각할 때가 있는데 호론과 낙론의 관계도 이에 못지않았습니다.
“성범심과 인물성을 두고 호론과 낙론이 서로 싸워 시비를 산처럼 벌여놓으니 나뉘고 또 나뉘고 갈라지고 또 갈라졌습니다. 창을 들고 검을 쥐고서 아웅다웅 싸우니 피투성이가 되지 않는 게 그나마 행운이랄까요.” (홍직필, 『매산집』 中)
시간이 흐르며 호론 측 인사들도 점차 정계로 진출했지만, 성리학적 순수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조 시대에 호론계 인사들은 ‘벽파’를 구성해 정조에 적극 협력한 남인, 소론, 노론 시파(낙론계)를 견제하는 역할에 앞장섭니다. 서학 등 서양문물 수용에 대해서도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벽파는 어린 왕(순조)을 대신해 왕실의 최고 권력자가 된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후원을 업고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동안 '탕평'으로 묶여 있었던 남인과 소론, 낙론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배신자' 노론 시파를 비롯해 남인이나 소론 같은 '사이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에 가까웠던 왕실 종친(은언군)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광해군 시절 북인은 중앙권력의 독점으로 만족했지만, 이때는 그야말로 씨를 말리겠다는 철저한 탄압으로 이어져 수십 년 전의 언행까지 꼬투리가 잡혀 그야말로 줄초상이 났습니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 우리가 아는 정조 시대를 수놓은 유명 인사는 대개 이때를 계기로 정계에서 사라지거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상대와의 공존 가능성 자체를 뿌리뽑고자 했던 이 같은 숙청은 권력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도덕적 우월감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군사정권의 회유나 탄압에 굴하지 않고,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고 정통 야당의 길을 지켰다는 ‘혈통적’ 자부심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꺼내 들었을 때 열린우리당 내에서 격렬한 반발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지금의 민주당은 당시와 비교하면 외연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학생운동 지도부뿐 아니라 IT 전문가, 대형어학원 오너 등 여러 곳에서 인재들이 충원됐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중도층의 지지까지 획득해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창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석수가 부족해 야당의 협조 없이는 개혁법안의 처리도 어렵고 이런 환경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를 강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경구 『호락논쟁을 통해 본 철학논쟁의 사회정치적 의미』·『조선, 철학의 왕국』, 허태용 『호락논쟁은 어떻게 계승된 것인가 - 사상 계보 그리기의 어려움』, 조성산 『18세기 호락논쟁과 노론 사상계의 분화』·『17세기 후반~18세기 초 김창협·김창흡의 학풍과 현실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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