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느리고 확실한 대학의 죽음

2017. 8. 9.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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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입시기관 아니라 꿈 꾸는 곳
기업 인력양성소 아닌 교양 충전소
특수 직업교육으로 환원될 수 없어
정부로부터의 자율성도 해법 못돼
우리 시대의 큰 재앙이 다가온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기조차 어렵다. 대학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교수들이 무관심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자 장기적인 비전도 책임도 없는 허식적 권위만 존재하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물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학들이 매우 느리고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는 점이다.

느린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전 세대가 전답과 가축을 팔면서 경배하던 ‘우골탑(牛骨塔)’이 이제는 ‘반값 세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 같은 말이 더 이상 오늘의 대학생들과 어울리지 않아서도 아니다. 오늘 대학이 천천히 죽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매우 근본적인 대학의 역할과 위치를 그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의 느린 죽음을 다음의 세 곳에서 발견한다.

첫째, 대학은 이제 입시기관으로 이해된다. 학부모와 정부, 심지어 대학 관계자들조차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연구와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며 ‘입시’는 새로운 신입생들을 선발하는 충원과정일 따름이다. 물론 ‘공정한’ 입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이며, 대학입시가 초·중·고 교육을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환경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학을 입시기관으로 바라보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학은 근본적으로 꿈을 꾸고 기르는 곳이며 바로 그 꿈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입시와 선발은 교육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비로소 교육이 시작되는 곳이며, 우리 공동체의 미래는 누구를 뽑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얼마나 많이 성장시킬 수 있고, 누가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먼저 개척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둘째, 대학은 이제 기업의 인력양성소로 이해된다. 초·중·고 교육이 입시교육이었던 것처럼 대학교육도 졸업 후 취직을 위한 교육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 어떤 전공들은 특정 직업군과 직결되며, 많은 기업이 대졸 신입사원으로 특정 전공자들을 선발하는 것을 보아도 대학이 기업에 대한 인력수급원이며, 사회에서 요구된 특정 기술을 미리 배워야 한다는 데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특수 직업교육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의예과 학생과 철학과 학생이 같이 교양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건 싫건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같은 문법으로 말하고 쓰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며 소통하지 않는 공동체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양’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었던가.

개인들은 직업으로만 정의되지 않으며, 때로는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인류가 어제까지 성취한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거기서 예기치 않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이 나중에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신입사원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미리 배우느라 어느 경영대생은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미술사 수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셋째, 대학이 결정적으로 질식하고 있는 곳은 정부·교육부와의 관계에서다. 과거 모든 정부가 대학정책에서 ‘자율’이라는 말을 잊은 적이 없지만, 이명박 정부는 총장 직선제를 폐지했고, 박근혜 정부는 정원감축 등의 구조개혁을 강권했다. 현 정부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가 대학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권 없이는 입시개혁도 사회개혁도 모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사회적 책무’가 강조되었던 것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었다.

사학비리나 국공립대의 비효율을 생각하면 대학에 몸담은 내 입장에서도 정부로부터의 무한한 자율권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반면 대학이 정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는 만큼 기업의 경제논리나 소비자들의 개별이익에 더 강하게 결박되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다. 정부 지원금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영혼을 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학은 매우 느리지만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입시기관으로서, 인력양성소로서, 그리고 준정부기관으로서 연명하면서 이제는 누구도 대학이 꿈과 지식을 새로 만들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가꾸는 자유와 고독의 공간이라는 점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은 이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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