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알파고 대 커제

이기환 논설위원 2017. 5. 2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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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승률이오? 0%에 가깝죠.” 23~27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전(烏鎭)에서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와 중국의 커제(20·柯潔) 9단이 3차례 대결을 펼친다. 그러나 커제가 이길 가능성이 사실상 0%라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손근기 5단은 “커제가 (알파고의 수를 그대로 따라두는) 흉내바둑 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짙다”고 전망한다. 인간바둑 9단이 인공지능을 흉내낸다? 굴욕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의 가소로운 장면이 떠오른다. 기사들은 ‘바둑의 수가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은 10의 170제곱인데 인공지능이 어찌 무궁무진한 수를 다 읽겠냐’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성을 어찌 따라올 수 있냐’고 얕잡아봤다. 결과는 1 대 4의 참패로 끝났다.

올해의 알파고는 더욱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박정환·커제·박영훈 9단 등과의 인터넷 대결에서 60전60승을 기록했다. 인간계의 입신(入神·프로 9단)들은 절망했다. 불과 100수도 진행하지 않았는데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나 있더라는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허탈하게 지켜보았다. 그나마 지난해의 알파고는 인간이 둔 16만건의 기보를 배우는 ‘지도학습’과 이를 토대로 더 높은 승률을 찾아가는 ‘강화학습’으로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올해의 알파고는 인간의 기보를 공부하는 ‘지도학습’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이제 인간이 익혀온 바둑은 다 터득했으니 필요 없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바둑을 두겠다, 뭐 이런 뜻이었다. 그렇다면 5000년 인간 바둑의 역사는 사라져버리는 건가. 새로운 알파고는 생전 처음 보는 포석으로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프로기사들을 농락했다. 지구의 원자 수보다 많다는 바둑의 수를 인간이 아닌 알파고가 즐기고 있는 것이다.

프로바둑기사(손근기 5단)의 입에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개진한 ‘지능폭발(특이점)’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 엄청난 학습능력과 연쇄적인 자체개량을 일으키는 시점, 그래서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이뤄낸 발전을 헛수고로 보이게 만드는 바로 그 시점에 도달한 것인가. 그러니 더욱 커제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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