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맥주 한병 팔았다"…서울대생 아지트 '녹두호프'의 몰락 [창간기획, 자영업 리포트]

박진석, 조현숙, 하준호, 전민구, 김현동 2024. 9. 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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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자영업 리포트


녹두호프 점주 김례숙씨가 지난 19일 유일한 영업의 흔적이었던 맥주병을 치우고 있다. 2만원의 하루 매상이 처량했지만, 말벗 하나 없이 공(空)치는 날에 비하면 차라리 ‘운수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이땅의 자영업은 쇠락하고 있었다.
유리문은 재질보다 무거웠다. 지난 19일 그걸 열고 들어온 유일한 손님은 오랜 단골이었다. 김례숙(69·여)씨는 그에게 맥주 한 병과 마른안주 한 접시를 대접했다. 그 음식의 단가 2만원이 그날 올린 매상의 전부였다. 더럽힌 게 없으니 씻고 닦을 것도 많지 않았다. 오후 11시쯤 맥주병을 치운 김씨가 무겁게 일어섰다. 출입문은 제 주인을 내보내는 것으로 변변치 않았던 노동을 끝냈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 일명 녹두거리에 터 잡은 지 27년. 한때 서울대생의 아지트였던 녹두호프는 옛 영화를 잃은 지 오래다. 손님이라고는 하루에 한두 무리가 고작이고, 공(空)치는 날도 드물지 않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땅의 숱한 자영업자들과 함께 그는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김씨는 농사꾼이었다. 195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또래 여성들처럼 배움이 길지 못했다. 고교를 작파한 뒤 섬(진도)으로 시집가 농부의 아내가 됐다. 논매고 밭 일구며 아들딸을 낳아 기르던 그는 가난과 농촌이 지긋지긋했다.

“‘에라! 남의 집 일을 할지언정 서울 가서 돈이나 벌자. 돈을 벌어야쓰겄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밀려든 지방민의 행렬에 그도 동참했다. 동류에 비해 늦은 상경이었다. 마흔을 넘긴 1996년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의 손을 붙잡고, 이고 진 채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남편과 고교생이던 딸은 고향에 남겨둔 채였다. 시댁 친척 몇몇이 살고 있던 관악구 삼성동에 터를 잡은 그는 이듬해 녹두호프와 인연을 맺었다. 녹두거리도, 녹두호프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그는 직원으로 채용됐다. 이른바 ‘운동권 호프’로 입지를 굳힌 가게라 선배가 후배를 데려오고 그 후배가 또다시 후배를 데려오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호프집 고된 노동이 남긴 건 툭하면 부러지는 늙은 몸뚱이


고시생과 서울대생이 빠져나간 이후 녹두 거리의 상인들은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아래 지도에는 중앙일보의 취재에 응해 준 가게 중 일부의 상호가 적혀 있다.
심야영업 제한 규제의 수혜도 톡톡히 입었다. 녹두거리는 자정 이후에도 은밀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사장이 가게 외부에서 내부의 직원과 무전기로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받은 뒤 셔터를 열고 금지된 손님들을 들여보냈다.

월급 100만원을 받으면서 5년간 일한 김씨는 그 거리와 가게의 전성기를 똑똑히 지켜봤다. 2002년 주인이 장사를 접으려 하자 2000만원의 권리금을 내고 잽싸게 가게를 인수한 이유다. 그가 인수한 뒤에도 한동안 녹두호프는 위상을 유지했고, 손님은 계속 밀려왔다.

하지만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심야영업 제한이 풀리고 서울대 인근 이곳저곳이 개발되면서 녹두거리 독점 체제는 종막을 고했다. 고객 공급원이던 운동권 문화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신세대는 선배들만큼 술을 많이 먹지 않았다.

김경진 기자

‘코로나 사태’는 치명상을 가했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년 동안 대학 새내기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애초 인연의 고리가 없는 그들이 그 이후에도 녹두호프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올해로 4년째 새내기 꼴을 못 봤어. 3월이면 우르르 몰려오던 학생들이 너무 그리워.”

설상가상으로 사법고시 완전 폐지와 함께 고시생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원룸촌으로 변한 그 지역은 밤에 잠만 자러 들어오는 소수의 외지인이 점거했다. 고객은 빠르게 줄었고, 공치는 날은 점점 늘었다.

그러는 동안 나이를 먹은 김씨는 세상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중력은 그에게만 작용하는 듯했다. 세상은 땅에 붙박여 있던 그를 음속으로 추월했고, 김씨에게는 그 꼬리라도 부여잡을 능력과 여력이 없었다. 배달앱이니, 키오스크니 하는 건 남의 이야기였다. 인건비 부담 때문에 첨단 문물에 익숙한 사람을 쓸 수도 없었다. 그는 빠르게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김례숙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그의 매출액은 월 300만~40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주류 매입비, 식재료비, 세금 및 공과금, 대출금 이자에 허리 치료를 위해 한 달에 두 번 맞는 주사 및 약값 등을 제하면 그의 손에 남는 건 잘해야 수십만원이다. 임대료(124만원)는 낼 수도 없다. 2000만원의 보증금은 이미 임대료 대신 깎여서 사라진 상태다. 국세청에서 1년에 한 번 주는 165만원의 근로장려금, 자녀들이 가끔 주는 용돈으로 겨우 임대료 펑크를 막고 있다.

27년간의 고된 노동이 그에게 남긴 건 거의 없다. 전세로 거주 중인 단독주택, 그리고 가끔 찾아와 추억과 용돈을 보태주는 옛 단골들이 전부다. 고용보험은 고사하고 제 몫으로 부어둔 국민연금도 없다.

뒤늦게 상경해 25년간 아파트 경비 일을 하면서 살림을 지탱하던 남편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난해 자리를 잃었다. 이제 가계의 고정수입은 월 45만원인 남편의 국민연금과 두 사람 몫의 기초연금 25만원, 운수 좋은 달에만 챙길 수 있는 수십만원의 가게 운영 수익이 전부다.

그가 폐업도 하기 어려운 이유다. 게다가 폐업은 공짜가 아니다. “건물주에게 폐업 얘기를 꺼냈더니 가게를 원상 복구하고 나가라더군. 주변에 물어보니 최소한 800만원은 나갈 거래. 그 돈이 어디 있어?”

그가 평가한 자신의 생활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30점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힘드니까….”

힘겹게 가게 문을 잠근 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김씨의 뒷모습이 처연했다. 노동과 노쇠로 지난해에만 두 번이나 골절된 그 연약하고 늙은 등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 얹혀 있었다. 유난히 어두웠던 골목길, 그 짐 받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한국의 아킬레스건’ 자영업…51명의 슬픈 현실을 듣다

「 665만 자영업자가 벼랑 끝에 섰다. 소득의 추락, 과잉 경쟁과 과잉 노동, 원가 급등과 부채 급증이 그들을 옥죄고 있다. 자영업 문제는 한국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저출산·고령화·인구·복지·빈부격차·지방소멸 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논란거리가 자영업 문제에 결부돼 있다. 지체의 늪에 빠진 한국이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반드시 털어야 할 난제다.

중앙일보는 창간 59주년을 맞아 자영업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 먼저 두 달간 발품 팔아 만난 자영업자 51명의 목소리를 토대로 5일에 걸쳐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도한다.

후속 보도를 통해서는 숨은 문제들을 발굴하고 국내외 정책들을 점검하면서 해법과 대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정치권과 정부의 각성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독자와 국민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특별취재팀=박진석·조현숙·하준호·전민구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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