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떠난 병원, 어떻게 유지될까
2월 19일 전국에서 전공의들이 진료 현장을 이탈한 이후 병원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갔을까? 흔히 언론에는 ‘과로하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은 이보다 복잡하다. 의사 면허는 사람을 살리고 돕기 위해 주어진 권한이지만, 위계로 점철된 병원에서 다른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쥐고 흔드는 열쇠이기도 하다. 곳곳이 ‘의료 대란’인 지금, 환자의 삶뿐 아니라 병원 노동자의 노동 환경도 위기에 놓였다. 이 위기는 면허가 만드는 위계를 따라 아래로 흐르며 노동자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 <기자말>
[Health Socialist Club]
▲ 슬기로운 의사생활 2020년부터 시즌제로 방영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
ⓒ tvn |
수술실을 비추는 이 짧은 장면은 병원에서 의사가 가지는 권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환자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를 제외하고도 아주 많은 노동자가 노력하지만, 수술실 한가운데서 다른 노동자를 둘러보며 "꼭 살립시다"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의사에게만 있다. 치료를 주도하고, 병원 노동에 관여하는 직군을 휘두르는 힘, 의사의 권력은 병원 노동의 중심이다.
의사의 권력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의료 대란의 핵심이기도 하다. 2월 19일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이 하나 둘 병원을 '개별적으로' 빠져나갔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파업 혹은 사직을 할 수 있는 권한은 모든 노동자가 갖는 권리다. 그러나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와 집회를 할지언정 그날 사직서를 내고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매우 드물다.
하물며 고용주도 아닌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직서를 던지듯 내 버리고 하루 아침에 나간 노동자에게 사직 효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유예 기간을 주고, 대화를 하자며 국가와 사회가 구걸하듯 나오는 장면은 이 '의사 권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 4일 오후 서울의 한 병원. |
ⓒ 소중한 |
이 안하무인격인 현장 이탈은 그 자체로 병원과 고용시장에서 이들에게 허락된 어떤 자유를 보여준다. 경영의 논리 안에서 엄격하게 통제되는 다른 병원 노동자와 달리, 의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처방의 권한을 토대로 다른 병원 노동자에게 오더, 즉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은 의사 직군만이 가지고 있다. 진료의 대부분 과정은 의사의 오더가 없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른 병원 노동자의 움직임은 여기에 따라 통제된다. 물론 이는 의사가 사람들을 위해 올바르게 전문성을 발휘한다는 전제 아래 사회가 부여한 것이다.
문제는 이 권력이 진료 현장을 넘어 병원 노동 그리고 의사가 있는 여러 일터의 일상에까지 흘러내린다는 데 있다. 뉴스에도 자주 보도되듯, 의사의 권력을 이용해 동료 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휘두르는 사례는 부지기수다(관련기사: "야! XX 같은 것" 의사 폭언…간호사에겐 일상이었다, "폭언에 고성"…대학병원 의사 '갑질' 논란 파장). 이보다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외부 회의를 목적으로 진료 일정을 조정하거나, 팀 회의 일정과 일 추진 상황을 자신의 일정에 맞추는 행위도 의사가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다.
진료 현장을 팽개치고 나간 의사 집단의 행위는 이 권력을 사람들을 위해 쓰는 대신 의료기관을 마비시키는 데 썼다는 점에서 사회적 믿음을 배반했다. 의사가 나간 뒤 병원이 휘청이는 까닭은 그만큼 병원이 의사 권력 아래서만 움직이도록 짜여졌기 때문이다.
'아수라장' 속 숨겨진 말들
그만큼 의사 면허가 만드는 공고한 권력은 의사를 정점으로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결정한다. 그리고 위계에 따른 불평등을 승인한다. 받는 돈에도 차이가 나지만, 이 위계를 단지 월급 차이로 축소하기에, 이 불평등은 더 너른 영역에 걸쳐있다.
병원의 업무와 운영을 결정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우선 지방의료원 등 일부 기관을 제외하면 의료기관의 장은 의료법상 의사만이 가능하다. 이뿐이 아니다. 병원의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한 역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병원의 주요 보직에는 대부분 의사가 있다. 때로 소수의 간호사가 임명되지만, 실제 발언권은 크지 않다.
작은 지역 사회라면 병원에서의 위계 관계가 지역 주민의 일상마저 흔든다. 면허증 혹은 자격증을 가진 노동자가 근무하는 일터는 상당한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는, 지역에 드문 '좋은' 일자리다. 지역에서 의사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대형 병원 은퇴 의사를 포함해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하는 한국 상황에서 병원이 의사 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더욱 심각한 사실을 내포한다. 주로 수도권 출신이거나 근무 조건이 조금만 나빠져도 수도권으로 돌아갈 의사들이, 지역에 사는 노동자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병원 채용 사이트에 게재된 공고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물류 직원, 사무직,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직업을 채용하고 있다. 2024.9.2 |
ⓒ 병원잡 |
▲ '구급차 향해' 전국 곳곳에서 응급실 운영이 파행을 겪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4일 군의관 등 보강 인력을 긴급 배치했다. 이날 서울 양천구 이화여자대학교 목동병원 응급의료센터 인근에서 한 환자가 이송되고 있다. |
ⓒ 연합뉴스 |
의사들이 병원을 떠난 이후 병원은 어떻게 유지됐을까.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 권한은 없고 일은 떠맡은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의사 면허가 없이는 의사와 동등한 위치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 공고한 권력 구조 속에서, 공백을 메워 보려고 불가능한 일들을 해냈다.
농촌 지역의 중소규모 병원, 서울 모병원에서 파견 온 전공의 한 명이 야간 응급실을 지키는 그곳에서는 전공의가 당장 현장을 떠나자, 행정 직원들이 날밤을 새우며 응급실 당직을 설 의사를 구해왔다. 직원들은 지칠 대로 지친 채 말했다. "그래도 우리 병원 응급실은 닫으면 안 돼요. 우리 엄마를 살려준 곳이고, 내가 갈 곳이고, 주민들이 의지할 유일한 곳이니까." 그보다 규모가 큰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의사의 빈 자리를 메웠다. 불안한 환자들을 달래고, 없는 권한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환자에게 필요한 일을 했다.
그러나 위기는 결국 아래로 흘렀다. 사태가 길어지자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들은 어려움에 대처한다며 아래로, 더 아래로 책임을 떠내려 보냈다. 의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고한 위계 속에서, 하위에 배치된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토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쯤은 이미 상식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강요는 서로에게 매우 곤란한 일이니 '권고'라는 형태를 빌리는 섬세함 정도는 발휘했다. 적자를 이유로 짧게 일하고 월급은 조금만 받아라, 돈 받지 말고 집에서 좀 쉬어라, 원하는 사람은 회사를 옮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긴축 경영을 이유로 초과근무를 금지하거나, 출장여비를 삭감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관련기사: "511억 손실" 서울아산병원, 결국 희망퇴직 받는다…의사는 제외).
'선택'의 모양새라도 취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일이 줄었다는 말은 위탁, 외주 등의 형태로 병원과 간접적으로만 고용관계를 맺은 이들에게는 곧 실직을 의미했다. 시간 단위로, 또 건수 단위로 돈을 받는 이들은 병원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인원 감축이나 운영 중단을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관련기사: [진료거부에 일감 잃은 미화원·간병인] "코로나·메르스 때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생계 위협받는 병원 노동자들 "피해 전가 말라" [심층기획-의·정갈등 6개월 후폭풍]).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일하는 사람을 줄인다고 해서, 병원에 남은 노동자들이 감당하는 노동의 절대적인 양과 강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사람이 줄면 남은 사람들의 일은 더 고달파지기 마련이다. 초과근무는 인정하지 않지만 일과 환자를 내팽개치고 갈 수는 없으니, 임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공짜노동' 시간 역시 더욱 늘어난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사람들일수록 노동 조건은 더 빨리 나빠져, 이들의 삶을 억누른다. 코로나 유행시에도 그랬듯, 문제가 생겼을 때 병원의 대응은 항상 이런 식이다.
▲ 2006년부터 2022년까지 OECD 주요국의 GDP 대비 의료비 비중 좌측 하단에서부터 빠르게 우상향하고 있는 진하늘색 선이 한국(Korea)이다. 자료=OECD Health at a Glance 2023 : OECD Indicators OECD iLibrary (oecd-ilibrary.org) |
ⓒ OECD |
예를 들어, 지난 8월 보건의료노조가 총파업을 예고했다가 철회한 일도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노동이 겪는 소외를 보여준다.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이 임박하자 국회와 정부는 화들짝 놀라 간호법을 만들었고, 그 결과 보건의료노조는 파업 철회를 결정했다. 애초에 이 파업은 '모든' 병원노동자의 과도한 업무 부담을 줄여 모든 노동자가 더 나은 처우를 누려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었다. 간호법과 함께 멈춰 서기 전, 간호법 제정과 파업 철회가 다른 직역 병원노동자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 설명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그러나 파업 예고부터 철회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말할 권력이 없는 이들의 고통이 침묵 속에서 또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다.
▲ ‘보건의료노동자, K-방역을 말하다: 더 나은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제안’ 121쪽 일러스트 2020년 사단법인 시민건강연구소가 발행한 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방역’을 ‘의대증원’으로, ‘K-방역’을 ‘의료개혁’이나 ‘필수의료’로 바꿔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 |
ⓒ 시민건강연구소 |
우리가 이미 앞선 글, '의료체계에 던지는 질문들'에서 밝혔듯, 전문성이 "정보를 지식으로 엮어 활용"하는 능력이라면, 이는 특권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다. 사회적 책무를 내버린 채 단순히 질병 또는 그 부재를 판단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토록 커다란 자율성이 용인될 이유가 없다. 전문성의 필요와 그 정당성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나침반 삼아 병원 안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유한 지식과 기술을 인정하고, 누구와 함께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고 돌볼 것인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판단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런 의사 결정은 다른 병원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다. 내원한 환자를 안내하는 일, 대기 순번을 알리는 일, 진료실로 안내하고 이동을 돕는 일, 복약 등 관리를 설명하는 일, 병실 이용 수칙을 일러주는 일, 환복과 식사, 화장실 이용을 돕는 일 등 모두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폄하하고 방해하는 위계라면, 필요 없다.
지금과 같은 한국 병원의 노동 조건은 각자가 가진 권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환자와 일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병원 이해 관계자 모두에게 나쁘다. 2014년, 2020년, 그리고 이번에도 전공의의 요구에 더욱 나은 수련(노동) 환경이 포함됐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의사 집단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정부 탓하기(☞관련자료: [대전협 비대위 성명서 240220] 정부는 잘못된 정책을 철회하고 비민주적인 탄압을 중단하십시오)' 혹은 '환자 탓하기(관련자료: "당신이 누군데 우리 애를…" 부모들 이러니 '소아과 의사' 안 한다)' 만 해 오고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지만, 노동 조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사용자에 있는데도 말이다.
특정 직능 단체만을 위한 법을 만드는 일이 마법처럼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러니 노동 조건의 개선을 바라는 노동자라면 우리의 노동을 통해 이윤을 남기는 사용자와 협상하는 것이 기본 중 기본이다. 다른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노조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공의나 의사의 긴 노동 시간 역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가능한 한 적은 인원으로 가장 높은 노동 강도로 일하도록 만드는 사용자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해 왔다.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인력 충원을 말해왔다.
노동자성을 인정하라는 전공의들의 요구는 이러한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애초에 의사도 병원과 계약을 맺은 노동자이니, 바람직하기 이전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적절한 배치로 인력이 충원된다면 다행이지만,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자격'을 가진 이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절한 배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일할 사람의 충분한 수를 확보하기에 앞서 '재배치'를 우선 선택하는 결정이 노동 조건은 물론 생산성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일러둔다.
▲ '보건의료노동자, K-방역을 말하다: 더 나은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제안 일러스트' 중 의사들이 병원 현장을 이탈한 이후 병원노동자들은 힘겹게 아수라장을 떠받쳐 왔다. 자료=시민건강연구소 |
ⓒ 시민건강연구소 |
<전공의 없는 한국의료 6개월, 남겨진 질문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지역에서 던지는 질문들
(2) 미디어에 던지는 질문들
(3) 의료체계에 던지는 질문들
(4) 노동에 던지는 질문들
(5) 의사에 던지는 질문들
(6) 7개월, 질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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