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가요연구가]
‘해뜰날’의 가수 송대관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9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대한가수협회장으로 고(故) 송대관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영결식장에는 태진아, 이자연, 배일호, 설운도, 강진, 김성환, 박상철, 김수찬, 김창열 등 후배가수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생전 고인과 가장 절친했던 태진아는 “형이 떠나고 제가 3일간 밥을 안 먹고 술로 배를 채웠다. 형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면 방송하는 게 별로 재미가 없을 거 같다. 치매에 걸린 집사람이 대관이 형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아이고 어떻게? 왜?’라고 하더라. 아내를 끌어안고 울었다. 형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웠으면 기억을 못 하는 아내도 형을 기억해 줄까 싶었다. 대관이 형, 잘가. 아 영원한 나의 라이벌이여”라며 애통해 했다.
정읍서 상경… 오랫동안 무명생활
송대관은 1946년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에서 태어났다. 기차가 다녀 일찍 개화한 지역이긴 했지만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송대관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실종되어, 그는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의 조부는 1919년 정읍에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지사 송영근이다. 송대관은 몇 년 전 필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송영근의 손자로서 굶어 죽더라도 남부끄러운 일은 못 한다”라며 울컥해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송대관은 1965년에 전주 영생고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인 손진석을 만나 가수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고 1967년에 정통 트로트 ‘인정 많은 아저씨’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데뷔 후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전전했다. 송대관이 데뷔하던 당시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던 상황이었기에 그의 노래가 히트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TV 출연은 고사하고 라디오에 노래 한 곡 내보내 것도 여의치 않았다.
‘해뜰날’ 빅히트… 10대가수 가수왕
무명가수로 지내며 힘든 시간을 보내던 송대관은 어느 날 자신의 힘들던 청년기를 되돌아보다가 갑작스레 큰 감흥을 얻어 종이에 미친 듯이 가사를 써내려 갔다. 송대관은 이 노랫말을 들고 역시 자신처럼 가난한 무명작곡가 신대성(본명 최시걸)이 살던 종로 뒷골목 단칸방으로 뛰어갔다.
그 종이를 내밀면서 “신 선생, 나도 좀 떠야겄어! 한 번 도와주쇼!”라며 작곡을 부탁했다. 작곡가 신대성은 송대관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송대관은 평생 신대성에 대해 “신 선생” 또는 “최 선생”이라고 불렀다. 가사를 보고는 이건 되겠다고 느낀 신대성이 바로 멜로디를 붙였다. 1975년에 발표한 ‘해뜰날’이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1975년 노래가 나오자 전국 방방곡곡에 ‘해뜰날’ 열풍이 불었다. 당시 석유 파동에 지쳐있던 시대 분위기로 인해 대중들이 크게 호응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노래가 발표된 지 몇 달 안 가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했다. 당시 1위곡을 부르려고 무대에 올라간 송대관은 전주가 끝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1976년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까지 오르는 등 스타덤에 올랐다. 1976년에는 자신의 노래를 모티브로 한 영화 ‘해뜰날’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노래의 히트는 가요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무렵 일명 ‘대마초 파동’으로 생긴 포크와 그룹사운드 음악의 공백을 록 트로트로 채우면서 이후 록 트로트 시대 개막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해뜰날’과 때를 같이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헌의 ‘오동잎’, 최병걸의 ‘난 진정 몰랐었네’,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김훈의 ‘나를 두고 아리랑’ 등 이른바 록 트로트 장르의 노래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 이민… 귀국후 ‘트로트 4대천왕’ 올라
‘해뜰날’이 빅히트하고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송대관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던 극장 쇼가 사양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송대관은 결국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슈퍼마켓과 이탈리안 식당, 샌드위치 가게, 세탁소 등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미국 이민생활은 고달팠고 한국 무대에 대한 유혹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이기기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바람처럼 귀국한다.
귀국 후 ‘정 때문에’를 히트시키며 재기에 성공한데 이어 ‘차표 한 장’, ‘혼자랍니다’, ‘네 박자’, ‘유행가’ 등 히트곡을 꾸준히 내며 1990∼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트로트 장르의 확산에 기여했다. 이들 노래 중 2003년 발표한 ‘유행가’는 그의 아내 이정심이 작사한 곡이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 본다
쿵쿵따리 쿵쿵따
유행가 노래 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
오늘 하루 힘들어도 내일이 있으니 행복하구나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 본다
유행가 유행가 서글픈 노래 가슴 치며 불러 본다
유행가 노래 가사는 사랑과 이별 눈물이구나
그 시절 그 노래 가슴에 와 닿는 당신의 노래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 본다
쿵쿵따리 쿵쿵따
송대관은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천왕’으로 꼽히며 트로트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4대천왕’ 4명은 각각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트로트 가수로서 태진아는 충청도, 송대관은 전라도, 설운도와 현철은 경상도 출신이다. ‘4대천왕’ 중 한 명인 현철은 지난해 7월 작고했다.
송대관은 2008년에 남진에 이어 대한가수협회 2대 회장에 취임해 가수들의 권익과 위상 정립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회장 재직 당시인 2009년 일본 노래방에서 한국 가요가 무단으로 사용된 점을 지적하며 현지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아내의 부동산 투자 실패로 월세살이
그러나 그에게 화려한 꽃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어둠의 세월이 더 길었다. 아내 이정심의 부동산 투자 실패로 살고 있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집과 경기도 화성시 토지까지 경매로 넘기고도 빚을 다 갚지 못하여 결국 법원에 회생 신청까지 했다. 이런 여파로 2014년에는 KBS와 MBC에서 출연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빚의 굴레는 계속 그를 옥죄었다. 송대관은 월세살이를 하며 70대 나이에도 전국을 다니며 하루 5~6개의 행사를 소화했다. 그는 차 안에서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때우며 작은 행사도 마다않고 무대에 섰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송대관은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은 내용도 모르고 ‘그렇게 잘못한 부인과 왜 같이 사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 아내처럼 날 위해 헌신하고 산 사람이 없다”라며 “아내가 없으면 나는 이 자리에 없다. 어디서 폐인이 돼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송대관이 세상을 떠나던 날,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SNS에 “내가 네 처를 야단쳤을 때 ‘저는 제 처를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고 감싸면서 사랑을 표하던 너”라며 고인과의 추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송대관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며 “매일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투자 실패로 하루아침에 집을 날리고, 월셋집으로 가면서 마당에서 키우던 가족 같은 진돗개 2마리를 지인에게 떠나보냈다. 망하면서도 안 울었는데 대성통곡을 했다”고 말했다.
후배가수 김연자와 갈등
고인에게 좀 죄송한 말이지만, 송대관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아내의 대출사기 문제도 있지만 동료·후배 가수들과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같은 호남 출신 후배 가수인 김연자와의 갈등이다.
2017년 송대관이 한 매체를 통해 병원에 입원한 사진을 공개하면서 김연자의 매니저 홍상기로부터 심한 폭언을 듣고 급성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론은 홍상기와 김연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자 두 사람은 기자회견을 열고 송대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홍상기는 송대관에게 수차례 정중하게 인사하는 CCTV 영상까지 공개했다.
“송대관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인사 관련 문제로 약간의 말다툼은 있었으나, 위협을 가한 적은 전혀 없다. 내가 정신 나간 놈도 아니고 선배한테 먼저 욕할 일이 전혀 없지 않느냐. 과거 송대관에게 1억 이상의 돈을 융자해준 적도 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져야 한다. 사건을 바로잡아 달라.”
소속사 대표인 홍상기에 이어서 김연자도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송대관이 3년 전부터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서 활동해 서먹한 사이지만 선배님들을 존경하고 후배들을 사랑한다. 난 하루 빨리 모두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열심히 인사를 하고 다녔다. 그런데 송대관은 인사를 잘 받아주지 않더라”라며 선배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홍상기는 갈등의 원인에 대해 ‘김연자가 가요무대 등 방송 무대에 마지막 순서로 오르는 것을 송대관이 불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에도 톱가수들 간에 ‘피날레’를 놓고 갈등을 벌인 경우가 가끔 있었다.
60년간 수많은 히트곡, 팬들 가슴속에...
한강에 얼음이 얼었다는 유난히 추운 날, 그는 영원히 팬들 곁을 떠났다.
송대관은 5년 안쪽 동년배인 남진과 나훈아, 조용필에 비해 이름값이 높거나 그리 화려한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TV 가요무대에서, 전국노래자랑 초청가수로, 지역 축제 무대에서, 방송 예능 프로에서 늘 이웃집 아저씨처럼 대중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국민들은 그의 노래 ‘해뜰날’, ‘네 박자’, ‘유행가’, ‘차표 한 장’을 들으며 험난하고 고단했던 세월의 강을 건너왔다.
그는 천국행 ‘차표 한 장’을 끊고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대중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라는 말처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