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기러기 아빠였지만 후회 없다.." 딸 두명이 전부 미국 고위관료라는 배우

1940년 7월 1일, 경성부에서 태어난 이대근은 말 그대로 ‘주먹의 시대’를 살았다.

아버지 이상돌은 당대 유명한 ‘주먹’이었고, 그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복싱, 레슬링 등 운동에 익숙했다.

혈기왕성했던 청소년 시절엔 고등학교를 무려 7번이나 전학했을 만큼 다혈질이기도 했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연극 무대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오랜 시간 무명 생활을 버텨야 했다.

그 무렵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처가 쪽 반대가 심했다. 당시 그는 아직 배우도 아닌, 장래가 불투명한 청년이었다.

이에 반해, 아내는 초1부터 고3까지 줄곧 1등을 지켜온 수재였다.

당연하게도 처가의 반대는 격렬했으며 결혼식엔 아내 집안 사람도 몇 명 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건 1974년, 영화 실록 김두한이었다.

액션 영화의 대표 감독 김효천이 주연으로 그를 발탁했고, 대성공을 거두며 단숨에 70년대 액션 배우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당대 액션영화에서 대역 없이 모든 장면을 소화했고, 그만큼 자주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40만 원 안 주면 안 한다”며 출연료 협상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 시리즈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회상했다.

1980년대 들어 비디오 시대가 열리면서 영화계는 빠르게 재편됐다.

이대근도 그 흐름 속에서 변강쇠, 뽕, 감자, 고금소총 같은 해학적 색채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지금은 에로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그는 “나도향, 김동인 같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라고 강조했다.

“뽕을 보면 내가 벗거나 선정적인 장면을 한 게 없다. 옷을 입은 채 연기한 장면뿐이다”라고도 말했다.

해학을 살린 풍자극의 연기였지만, 강한 이미지 탓에 오랫동안 오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 시기 무려 1년에 17~18편을 직접 골라 출연할 만큼 활발히 활동했고, 당시 연예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 배우이기도 했다.

딸 셋과의 이별, 그리고 31년의 기러기 아빠

결혼 후 딸 셋을 두었는데, 첫째와 셋째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대근은 결심한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자. 그렇게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고 그는 홀로 한국에 남아 기러기 아빠가 된다.

무려 31년 동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야 했다. 왕복 비행기표만 280장이 넘는다.

미국에서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시라소니의 비디오 테이프 두 개만 들고 은행에 찾아가 5만 불을 대출받기도 했다.

그렇게 얻은 돈으로 워싱턴 DC YMCA 건물 안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열어 아내가 운영했다. 26년 뒤에야 정리했다.

아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세 딸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첫째와 둘째는 약학박사로 미국 FDA에서 고위직에 있고, 막내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사위들까지 합치면 박사가 넷, 손주만 일곱이다. 현재 이대근을 포함한 가족 모두 워싱턴DC 인근에서 지내고 있다.

어느새 팔순을 넘겼지만, 여전히 건강하다.

2022년, 3년 만에 귀국해 고향 음식을 먹고, 기자들을 만나고, 국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스크린 속 거칠고 강한 이미지와 달리, 이대근이라는 사람은 가족에겐 한없이 다정했고, 삶에선 누구보다 치열했던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온 그의 말 한마디엔,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배우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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