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아 소년이 택한 일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9년 있었던 제62회 칸영화제를 기억한다. 박찬욱의 <박쥐>가 3등상 격인 심사위원상을 받았던 때다. 이 해 칸영화제엔 유난히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았는데,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수상도 이제는 명장 반열에 오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에 돌아갔다. 봉준호의 역작 <마더>가 <송곳니>에 가렸으니 애국심 강한 한국 영화팬에겐 두고두고 아쉬울 수 있겠다.
이 해 황금종려상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부문 면면은 대단히 화려했다. 박찬욱을 비롯하여 켄 로치, 라스 폰 트리에, 쿠엔틴 타란티노, 이안, 제인 캠피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차이밍량, 두기봉 등 전 세계 손꼽는 작가들이 공들여 만든 작품을 들고 칸의 주인공이 되기를 갈망했다. 황금종려상은 21세기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하는 미카엘 하네케, 그의 <하얀 리본>이 차지했다. 3년 뒤 <아무르>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는 하네케가 세계 영화계에 제 존재를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봉준호의 <마더>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에 가렸다면, 미카엘 하네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역작 또한 있었다. 자크 오디아르의 <예언자>다. 2등 격에 해당하는 칸영화제 그랑프리, 즉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예언자>는 2015년 <디판>으로 번듯한 황금종려상 수상자가 된 자크 오디아르 영화인생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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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언자> 스틸컷 |
| ⓒ 판씨네마 |
2010년 개봉해 2만 5000명의 관객을 모았던 <예언자>가 올해 다시 개봉하게 된 데는 위와 같은 흐름이 자리한다. 신작 <에밀리아 페레즈>의 아쉬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판씨네마가 배급하는 <예언자> 만큼은 충분히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예술영화를 즐기는 팬들에게 오디아르 감독의 작품군을 다시금 돌아볼 귀한 기회가 될 수 있는 데다, 여전히 그의 영화가 생소한 팬이 적지 않단 점에서 신작 못잖은 인상을 주는 덕이다.
<예언자>는 오디아르 작품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꼽힌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오디아르 작품세계 가운데 다분히 이색적인 색채를 가졌다면, <예언자>는 가장 깊은 부분을 관통하는 영화라고 평가된다. 누아르와 성장드라마란 비교적 인기 있는 장르 가운데 사회적 문제와 개인적 고뇌를 적절히 녹여 인상적인 작품을 빚어냈다. 특히 이상과 현실 사이, 실재하는 것과 환상 사이를 오가며 적절한 곳에 자리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선택이 주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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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언자> 스틸컷 |
| ⓒ 판씨네마 |
누구도 그를 보살펴 준 적 없었다. 제 뿌리일 게 분명한 아랍사회도, 나고 자란 나라 프랑스도, 저를 낳고 버린 부모조차도 말릭을 거두거나 지켜주지 않았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말릭이 가진 것이라곤 다 썩은 옷과 뜯어진 신발, 지금은 사라진 50프랑짜리 옛 프랑스 지폐가 전부다. 한화로 치자면 1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인데, 말릭은 이를 감추려 제 신발 찢어진 틈 속으로 돈을 밀어 넣으려 궁리한다. 6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청년 말릭의 관심이 고작 그런 것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는 말릭에게 처음으로 소속된 조직이 되어준다. 그곳엔 규율이 있고, 질서가 있다. 그 가운데 무엇은 합법이고 다른 무엇은 그렇지 못하지만, 그것이 또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임을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알고 있는 터다. 말릭에게 교도소에서의 삶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다.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문맹에다 기댈 곳 하나 없던 그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보낸 19년의 시간이 그에게 준 것이 꼭 그 정도였다. 영화는 교도소에서의 6년이 말릭에게 일으킨 변화에 주목한다.
말릭이 감옥에 들어올 즈음 수감된 또 다른 죄수가 있다. 역시 아랍계인 그는 레예브(히켐 야코비 분)란 인물로,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코르시카계 갱단과의 다툼 도중 검거된 레예브는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로 한 대가로 감형을 약속받은 상태다. 자연히 감옥을 꽉 잡고 있는 코르시카계 갱단이 그를 노린다. 잔뜩 졸아들어 주변을 경계하는 레예브와 경계를 뚫고 그를 살해하려는 갱단의 상황이 가만히 있던 말릭을 못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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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언자> 스틸컷 |
| ⓒ 판씨네마 |
레예브를 죽이지 못하면 제가 죽을 것 같은 상황이다. 기댈 곳 없는 말릭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레예브를 죽이기로 한다. <예언자>는 말릭이 루치아니 패거리가 짠 계획을 실행에 옮겨 레예브를 처단하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과 죄책감이 그에게 붙어서는 떠나가질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죽은 레예브가 어느새 말릭의 동행처럼 익숙해진다. 세상을 몇 초 쯤은 앞서 내다보는 죽은 레예브가 말릭에게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예언자'란 칭호를 안긴다.
오디아르는 말릭이 교도소의 새로운 강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가까이서 그려낸다. 말릭은 제 부모에게, 또 사회로부터 방치된 존재였다. 다른 누구보다 악하거나 못난 존재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제 삶으로부터 버려져 범죄자의 낙인이 찍혔다. 그런 그가 교도소 안에서도 제 의지와 달리 더 큰 죄악에 젖어 드는 과정이 다분히 인상적이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약해서 악에 다가가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존하는 분명한 단면이지 않은가.
범죄자, 그것도 강력범죄자를 낙인찍고 우리와 다른 무엇이라고 단정하는 흔한 시각으로부터 이 영화는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깊고 진지한 자세로 말릭의 삶을 들여다본다. 영화를 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거리와 온도, 속도로 그를 지켜보게 된다. 그로부터 한 인간이 범죄자가 되고 더욱 큰 범죄자가 되는 과정을 마주한다.
우리의 세상이 놓아버린 가능성
흥미로운 건 이 지점이다. 범죄자가 더 중한 죄를 짓고 깊이 악의 세계에 발을 담그는 과정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서사가 성장드라마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훌륭하기까지 한 성장인 것이다. 방치됐던 이가 스스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어느 교도소 보스의 탄생기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가 놓아버린 선한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범죄누아르로서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해낸다. 역경을 딛고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성장드라마로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언자>가 갖는 가장 커다란 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면목을 까발리는 일이다. 이 세상이 어두운 피부색, 주요한 인종이 아닌 종족으로, 심지어 부모조차 없는, 그리하여 학식도 직업도 어떤 문화자산도 갖지 못한 존재에게 얼마나 야박하고 잔인한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다. 고작 교도소와 같은 기관에서도 이뤄질 수 있는 말릭의 성장을 사회는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방치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교도소에 들어올 때 가졌던 50프랑짜리 지폐가 그가 출소할 때는 의미 없는 무엇으로 전락하고 마는 모습을 영화는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프랑스가 프랑이 아닌 유로를 쓰게 되어서만은 아닐 테다. 말릭은 단 6년 만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었다. 훨씬 크고, 강하며, 멋진 존재가 되었다. 50프랑짜리 지폐 하나의 무게가 그리하여 그에게는 전혀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멋진 일이 아닌가.
괜히 오디아르를 세계적 작가로 논하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법을, 인간을 대하는 법을, 장사를, 삶의 방향을 차례로 배워나가는 말릭의 상황을 우리 또한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겪었고 겪어내야 한다. 보잘것없는 잡범이 교도소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인물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그 어떤 성공신화 못잖은 감동을 준다. 이후 그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우리는 이미 한 인간을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선 자리, 쓰는 말씨며 피부색 따위로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뒤가 아닌가.
한국 독립예술영화관 가운데선 정식 개봉하는 <예언자>와 <에밀리아 페레즈>, 두 작품에 더해 <파리, 13구> <디판> <러스트 앤 본> 등 오디아르의 또 다른 작품들을 묶어 일종의 감독전까지 기획한 곳도 있다. 오디아르는 마땅히 들여다봄 직한 감독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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