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자성하자'던 장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19세기는 민란의 세기였다. 대중의 정치적 요구가 관철되지 않아 약 100개의 민란이 분출했다. 민란이 잦아지고 특권층이 공격받는 일이 빈번해진 이 세기의 끝자락에 도드라진 현상이 있다. 특권층이 맞불시위 혹은 맞불집회로 대중의 정치운동에 대한 대응에 나선 일이다.
안중근 의사 회고록인 <안응칠 역사>에서도 확인되듯이, 안 의사 아버지인 안태훈 같은 보수 인사들은 1894년에 전국 곳곳에서 민병대를 조직해 동학군에 맞서 싸웠다. 대중이 사회질서를 흔드는 상황에서 보수세력도 이에 질세라 총을 쏴대며 함께 흔들어대는 방식을 구사했다.
비슷한 방식이 일제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도 활용됐다. 일제는 대중의 궐기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친일 보수세력을 맞불로 내세웠다. 일제는 고종황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의병항쟁이 격화된 1907년 하반기부터 한국인 자위단을 조직해 민심 흔들기에 나섰다. 의병투쟁으로 동요된 민심을 흔들어대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민심 안정책이었다.
2017년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에 게재된 역사학자 이양희의 '3·1운동기 일제의 한국인 자위단체 조직과 운용'은 "자위단은 각 면의 행정관리와 친일적인 지역 유력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1908년 11월 말 2164개 단(團)에 508,585명의 조직원이 소속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한국인 사이에 균열을 조직하고 의병의 귀순을 유도하는 동시에 한국인 민심을 안정시켜 일제 정책에 대한 동조적 여론을 조성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말한다.
일제는 이 방식을 1919년 3·1운동 때도 사용했다. "138군(郡)이 넘는 지역에서 한국인 자위단체가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220개 군의 절반 이상에서 자위단을 조직해 3·1 횃불에 대한 맞불을 놨다.
▲ 1943년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시절 이진호 |
ⓒ 위키미디어 공용 |
당시 전라북도장관이었던 이진호가 자성회를 운영한 방식은 위 보고서에 인용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문서> 제31책에서 확인된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진호는 유세원들을 집집마다 파견해 취지서를 보여주고 서명을 받는 방식으로 여론 흔들기에 나섰다.
2016년 촛불집회에 맞서 맞불집회를 일으킨 극우세력도 집집마다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진호를 비롯한 1919년 당시의 친일 극우세력은 그런 성의를 발휘했다. 자금과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진호는 유세원들을 파견하고 감독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역 책임자인 그가 직접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위 이양희 논문은 "전라북도에서는 군산·정읍·고창·부안·김제·익산·옥구에서 도장관 주도하에 간담회가 개최되었다"라며 "전주에서는 도장관 및 군수를 비롯한 고위 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수백 명을 모아 일본기독교조합 강사의 시국강연을 개최했다"고 설명한다. 논문은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사령관이 이진호을 두고 "한국인 중 제일의 우군"이라고 호평한 일을 소개한다.
전국 곳곳에서 한국인들이 목숨 걸고 만세를 외치는 동안에, 이진호 같은 친일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포섭하기 위해 가가호호를 방문하고 대중집회를 열었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친일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자성을 외치며 전국을 누비는 모습은 친일파들이 얼마나 자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는 등 승승장구
고종 임금 초기인 1867년 한성에서 출생한 이진호는 15세 때인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 직후 그는 무관 이외의 다양한 것들에도 도전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진호 편은 "통역관 양성소 동문학에서 영어를 공부했다"라며 "이를 바탕으로 1886년 3월에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세운 의학교 제중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고 기술한다.
이처럼 10대 때 미국 쪽으로 기울었던 그는 27세 때인 1894년에 동학혁명을 겪으면서 일본 쪽으로 기울게 된다. "1894년 10월 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발족한 양호도순무영의 교도소영관을 맡아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일본과 함께 한국 민중의 반외세·반봉건 혁명을 진압하는 이진호의 27세 때 모습은 52세 때인 1919년에도 거의 비슷하게 재현됐다. 한 개인이 25년 간격으로 벌어진 두 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비슷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다. 민중에 대한 친일 보수세력의 시각이 두 시기 이진호의 모습에서 묻어난다.
일본은 1894년에 조선을 무단 침입한 뒤 조선군과 청나라군과 동학군을 연달아 꺾었다. 그러는 동안에 경복궁에 갇혀 일본의 내정간섭을 지켜봐야 했던 고종은 1895년 11월 27일(음력 10.11) 경복궁 동북쪽 모서리인 춘생문을 통해 궁을 빠져나가려 하다가 실패했다(춘생문 사건). 일본과 친일파가 없는 데 가서 독자적인 왕명을 내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5월 6일자 독립운동가외전 임최수 편에서 서술했듯이 그때 고종의 발목을 잡은 인물이 이진호다. 친위대 대대장인 그는 고종을 위해 대궐 문을 열어주는 책임을 맡았다. 그랬던 그가 김홍집 내각에 제보하고 고종의 탈출을 차단했다.
▲ 1896년 아관파천 당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러시아 공사관 |
ⓒ 문화재청 |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평양일어학교장 등을 지낸 그는 1910년 국권침탈 뒤에 경북도장관·전북도장관 등을 역임했다. 더 나아가, 한국인 최초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되고 중추원 부의장과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는 등등의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굵직하게 친일재산 벌어들인 고액 연봉자
이 과정에서 친일재산도 많이 축적됐다.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이 내정간섭을 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귀국해 관직을 역임했으므로 그 뒤에 그가 벌어들인 소득은 친일재산이 될 수밖에 없다. 1907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일제 관청이나 관변단체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으니, 그의 재산 중에서 깨끗한 것은 거의 없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진호는 길면서도 굵직하게 친일재산을 벌어들였다. 그는 고액 연봉자였다. 1931년에 지금의 국회의원급인 중추원 참의가 되어 연봉 2500원을 받았고, 1941년에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연봉 3500원을 받았다.
중추원 참의가 된 해에 발행된 1931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는 서울(경성)의 전화 교환수가 하루 평균 60~70전을 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1930년 12월 20일 하루 동안에 이들은 평균적으로 2360번의 전화 접속을 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쉬지 않고 한 달 내내 할 경우에는 월급이 최고 20원 정도였다. 이진호의 소득은 이보다 10배 이상이었다.
이진호에게는 고정 봉급 외에 친일 보너스도 많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1907년에 일본 왕세자로부터 하사금 700원을 받았고, 3·1운동 이듬해에 일본 정부로부터 400원을 받았다. 1934년에도 일본 정부로부터 600원을 받았다.
이 외에 금배·은배 같은 것도 받았으므로 일제와 손잡고 한국 민중을 억압한 것이 그에게는 수지맞는 장사였다. 대한독립 만세에 맞서 "자성하자!"고 외쳐준 그에게 일제는 한국 민중에게서 착취한 금전의 일부를 떼어 두둑하게 보상했다. "1946년 9월 3일 사망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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