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실제 모델이 있다?
“장애를 극복한 인권변호사.”
살면서 이 말을 참 여러 번도 들었다. 어디엔가 합류하거나 참석할 때 혹은 인터뷰를 할 때 자주 쓰이는 나에 대한 소개문구 같은 것이다. 이 표현이 내게 씌워질 때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동시다발적인 물음표들이 올라오곤 한다.
크리스마스를 지나서 태어났어야 했던 나는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일찍 세상에 태어났다.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만삭의 엄마는 어느 추운 날, 나의 할머니의 엄명을 받들어 손수레 한가득 실린 총각무를 다듬다 마당에서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야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마어마한 난산의 시간이 이어졌다. 응급 제왕절개수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동의서에 도장을 찍을 아빠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병원에 없었다.
극심한 진통에 엄마는 기진맥진해 의사소통이 안 되고 의료진은 수술에 동의해달라고 현장에 있던 할머니에게 사정을 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자를 봐야 했던 할머니는
“제왕절개수술을 하면 애를 둘밖에 못 낳는다는데 둘 다 딸이면 책임질 거냐?”라고 하며 동의서 서명을 거절했다. 옥신각신 실랑이 중에 엄마는 결국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아무리 응급 상황이라고 해도 보호자 동의 없이 수술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의료진은 차선책으로 겸자분만(태아의 머리를 집게로 잡아 끄집어내는 분만법)에 들어섰다.
겸자분만은 그야말로 의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론상의 분만법이었고, 그 작은 동네 산부인과에서 겸자분만을 시도한 사례 역시 당연히 없었다. 미끌미끌한 머리통은 쉽게 잡히지 않았고 결국 겸자 대신 끝이 뭉툭한 갈고리가 동원되었다.
갈고리는 어디든 걸려라 하며 아기가 있는 곳을 푹푹 찍어댔고 내 오른쪽 눈은 그때 크게 손상되었다.
갈고리로 여기저기 긁힌 채 뻑뻑한 엄마의 몸에서 억지로 끌려나온 내 머리통은 몸통만큼 길쭉해져 있었고 얼굴과 턱은 온통 깊은 상처로 패여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귀여움, 사랑스러움, 행복에 찬 눈물과 같은 흔한 출산 현장의 감동이라고는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었던 괴이하고 고통스러운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다.
태어나는 과정에서 오른쪽 눈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당시 엄마에게 귀띔이나마 해준 사람은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었다. 그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했고 엄마의 몸도 난산으로 심하게 상했기에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엄마와 아기 둘 다 살아서 만난 것에 그저 감사해야 했다.
태어난 지 백일이 지났는데도,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빛이 있는 모든 곳에서 밤낮없이 그렇게 빽빽 울어댔다고 한다. 눈을 크게 다쳐 많이 아팠을 테니 당연했다. 오른쪽 눈은 그냥 보기에도 희뿌옇고 이상했다. 엄마가 답답한 마음에 아기 눈이 왜 이런지 이유를 물었지만 분만했던 산부인과에서는 모르겠다고 입을 닫았고, 근처 안과에서도 아기가 너무 어려 제대로 검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엄마는 고민 끝에 회복도 안 된 몸으로 이제 겨우 팔뚝만 해진 나를 안고 서울의 큰 병원에 데려가서 온갖 검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오른쪽 눈의 안압이 지나치게 높은 것으로 보아 선천적인 안암眼癌으로 보인다”라며 우리나라 제일이라는 종합병원에서 급하게 수술 날짜를 잡아주었다. 안 좋기는 많이 안 좋았나 보다. 태어난 지 몇 개월도 안 된 아기였던 나는 그렇게 전신마취로 수술대에 올랐고 열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수술방에서 나왔다.
작은 몸으로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꽁꽁 묶인 두손목과 두 발목에 온통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기나긴 수술을 통해 오른쪽 눈의 신경과 근육조직 대부분을 들어낸 후에야 암세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눈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있어서는 안 될 오진이었다. 그렇게 내 한쪽 눈은 원래 내 삶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두 병원의 ‘대환장 콜라보’로 나는 사실상 삶의 첫 순간부터 한 눈으로만 세상을 보며 살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두 눈으로 보다가 중간에 한 눈이 없어지면 나머지 한 눈도 금방 안 좋아진다는데 나는 처음부터 한 눈으로만 보았기에 눈이 그 상태에 빠르게 적응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뭔가를 보는 눈의 기능 자체에는 큰 불편이 없었지만, 눈이 보인다는 ‘상태’와는 달리 내가 겪어야 했던 ‘상황’은 별로 편안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확연히 다른 외모, 그러니까 내 얼굴 때문이었다.
유치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은내 곁에 오기를 주저했다. 커다란 플라스틱 눈이 움직이지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얼굴 안에 말 그대로 ‘박혀’ 있는 아이여서 그랬으리라.
아이들은 “너 눈 왜 그래?” 하면서 신기해하거나 궁금해할 뿐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자고 하거나 마음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아이 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본다는 ‘너 참 예쁘다’나 ‘귀엽다’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괜찮았다. 태생적으로 씩씩한 성격에 힘도 세고 목소리도 큰 편이라 별로 주눅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배우는 족족 쉽게 이해하고 글자도 숫자도 빨리 깨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같이 놀면 같이 노는 대로, 혼자 놀면 혼자 노는 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장애인 등록은 성인이 되고 난 이후 부모님이 하겠냐고 물으셔서 진행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었으니 뭔가 미뤄둔 일을 처리해야 할 것만 같아 엉겁결에 등록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장애인이 뭔지도 잘 모르고 말이다.
우리나라 법은 장애를 “신체적・정신적 손상이나 기능 상실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이 있는 상태” 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를 고여 있는 개념이 아닌 진화하는 개념으로 보면서 “손상이나 기능 상실을 가진 사람을 둘러싼 태도적・환경적 장벽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장애를 이해하고 있다.
법조문과 협약의 내용을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여전히 내가 장애인인가에 대한 답이 딱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복지카드를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 ‘법률적 장애인’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한 눈이 없이 손상을 입은 가운데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는 물론 내가 속한 사회와 만들어가는 상호작용이 그리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정말 나는 장애인인가.
위 내용은 김예원 변호사의 책 <사람을 변호하는 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김예원 변호사는 수동 킥보드를 타고 다니며 무료 수임 사건만 맡고, 육아 휴직 기간에 성폭력 전담 상담사 자격까지 얻어서 동료들은 그를 '이상한 변호사'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예원 변호사는 자신이 장애인이서도 아니고,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도 아니고, 대단한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함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본래 모습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저는 그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뿐이니까요.똑같은 사람으로서 말이죠.
소수자와 소외된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편견이나 동정 또는 배척과 거부의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죠.
이 글이 그러한 마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는 마음으로 저의 진짜 이야기, 『사람을 변호하는 일』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이 책을 읽는 고마운 당신도 저와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