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인연, "끝장 보자" 악연으로…'소송의 늪' 빠진 고려아연-영풍
마지막 '화해 제스처' 무산…신뢰 무너지며 결국 숫자싸움
영풍→고려아연 : ▲자기주식취득금지 가처분 소송 ▲자사주 취득 목적 공개매수절차 중지 가처분 소송 ▲사외이사에 대한 배임 고소 ▲고려아연 경영진에 대한 배임 고소.
고려아연→영풍 : ▲장형진 고문 등 영풍 측 인사 배임 고소 ▲배당가능이익 관련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금감원 진정 ▲장형진 고문에 대한 환경법 및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검찰 고소.
영풍과 고려아연이 최근 법원과 규제기관을 통해 주고받은 고소와 가처분, 본안소송의 주요 내역이다.
이 부분만 보면 오랜 기간 공방을 주고 받아온 철천지 원수 지간 같아 보이지만, 사실 두 기업은 한 사람의 일생에 비견될 만한 75년이란 세월을 함께 걸어온 파트너였다.
황해도 사리원 태생의 동향인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월남해 1949년 영풍기업사를 공동 창업한 후 두 집안의 공동경영체제가 이어졌고, 1974년에는 고려아연이 탄생했다. 2세 경영이 시작된 1990년대에는 영풍을 장형진 회장이, 고려아연을 최창걸 회장이 경영하는 구조가 됐지만 양측이 영풍 지분을 20% 중반으로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공동경영 기조는 유지됐다.
두 집안 간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불과 2년 전인 2022년이었다. 고려아연의 호실적과 영풍의 부진, 그리고 장씨와 최씨 집안이 들고 있던 지분에 변동이 생기면서 70년 넘게 이어져 온 혈맹에 균열이 생겼다.
지난달 13일 영풍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를 끌어들여 고려아연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주식 공개매수에 나서면서부터 균열은 심화됐다. 최씨 집안 3세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자사주를 매입해 경영권을 방어하겠다고 맞서며 갈등은 정점을 향했다.
영풍과 고려아연이 연이어 소송과 고소로 ‘분쟁의 늪’에 빠진 것도 이 때부터다.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여론전도 곁들여졌다.
영풍이 고려아연 대표이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자기주식 취득금지 가처분이 법원에서 기각된 지난 2일에는 두 집안의 갈등이 조금이나마 호전될 가능성도 엿보였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베인캐피탈과 함께 주당 83만원에 총 3조1000억원 규모의 자기주식 공개매수에 돌입한다고 밝히면서 영풍에 화해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최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현재 영풍이 당면한 과제는 안전 문제 해결을 위해 석포제련소의 정상적인 운영을 회복하고 대표이사 전원이 구속된 비정상적 경영을 정상화하는 것”이라면서 “영풍이 원한다면 석포제련소의 현안 문제 해결에 기꺼이 도움을 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발언에 대해 “화해 제스처”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유가 무엇이든 적대적 M&A로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영풍이 고려아연에 대한 강한 비판을 이어가면서 화해 가능성은 사라졌다. 강성두 영풍 사장은 이날 데일리안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 싸움을 예상도 못했던 것도 아닌데 이정도에서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겠다”며 “다시 한 번 (공개매수가격)을 상향하는 것까지 포함해 모든 수단을 검토할 의사가 있다”며 물러설 뜻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강 사장은 특히 영풍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겠다는 최 회장의 기자회견 발언에 대한 데일리안의 입장 표명 요청에 “지금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제안을 그냥 던진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날 영풍은 고려아연의 자기주식 취득 목적 공개매수 절차를 중지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재차 제기했고, 영풍의 공매매수 동맹인 MBK는 자사주 공개매수에 찬성한 고려아연 이사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에 맞서 고려아연 측은 배당가능이익, 즉 고려아연의 자기주식취득한도가 586억원 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상대 측을 시세조종과 시장교란행위로 금감원에 진정하는 한편, 민형사 등 법적 조치에 들어갔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MBK와 영풍은 그동안에도 각종 허위사실 유포와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 공개매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의도적으로 왜곡 및 확산시켜 시장 불안을 야기하는 행위를 일삼아왔다”며 “일련의 행위와 발언 등은 더 이상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임을 본인들 스스로 시인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최 회장의 ‘화해 제스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동안의 상황을 보면 영풍과 고려아연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모습이다. 상대 기업은 물론, 경영진과 오너 일가 개인을 향한 법정 공방과 비방전이 이어지면서 갈등의 골은 메워지기 힘들 정도로 파였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금의 영풍과 고려아연 간 갈등 상황은 대화로 풀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면서 “법정 공방과 상호 비방 속에 신뢰 관계가 완전히 깨졌기 때문에, 결국 숫자(지분) 싸움에서 한 쪽이 이길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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