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탄은 많고 리스크는 크고… 삼성전자 ‘나스닥行’ 선긋기

1997년 대만 TSMC에 이어 SK하이닉스도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하며 나스닥 시장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반면 삼성전자는 여전히 미국 증시 진출에 거리를 두고 있다. 삼성전자가 국내 주식을 예탁 기관에 맡겨 발행하는 ADR을 상장할 경우 미국 투자자들은 한국 증권 계좌 개설이나 환전 절차 없이 달러로 직접 삼성전자에 투자할 수 있다.
이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외신에서 제기한 ‘ADR 발행 검토설’에 대해 “전혀 아니다”라고 즉각 반박했다. 삼성전자가 나스닥 상장에 선을 긋는 데는 단순한 ‘투자 실탄 확보’ 이상의 고차원적인 셈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자금 여력이 충분하고 사업 구조가 반도체 외에 휴대전화, 가전 등으로 다변화돼 있어 해외에서의 자금 조달이 급하지 않은 데다 미국 시장 상장 시 뒤따르는 엄격한 공시 의무, 현지 당국의 규제 부담 등을 고려해 ‘속도 조절’이라는 전략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삼성전자가 미국 증시 상장을 위한 ADR 발행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으며 투자은행들과 예비 논의를 진행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초기 구상 수준의 논의로, 주관사나 구체적인 발행 로드맵 등 결정된 사항이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앞서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며 실무 작업을 진행하다가 최종 단계에서 발을 뺀 바 있다.
ADR 상장 검토 소식에 삼성전자는 즉각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냈다. 평소 외신 보도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던 삼성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수위 높은 반박 메시지를 낸 것이다.
그간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천문학적인 반도체 설비 투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 증시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돼 왔다. 통상 최첨단 반도체 팹 1기를 짓는 데는 평균 60조원 안팎의 거액이 들어간다. SK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선택한 것 역시 투작금 확보 목적이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0일 ADR 상장을 통해 265억 달러(약 4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은 국내 반도체 투자에 사용될 예정이다. TSMC는 1997년 ADR을 상장해 확보한 약 5억 달러를 당시로선 최첨단 공정이었던 8인치·12인치 웨이퍼 공장 건설에 투입했다.

다만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국내 유가증권시장뿐 아니라 영국 런던 증시(GDR)에도 상장돼 있는 데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등 주요 글로벌 지수에도 편입돼 있어 당장 해외 자금을 유치하는 데 큰 제약이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반도체뿐 아니라 스마트폰과 가전 등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현금창출력을 유지하고 있고, 대규모 현금성 자산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연결기준) 현금성 자산은 약 147조원에 이른다.
왕수봉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16일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달리 사업이 반도체에만 집중돼 있지 않고 가전, 모바일 등 다각화돼 있다”며 “반도체 사업 부문 하나만으로 해외 상장 여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기는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반도체 기업’으로 비교되고 있으나, 기업 체급과 재무 구조 면에서는 격차가 크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ADR 상장은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한 필수 수단이라기보다 기업가치와 글로벌 위상 제고를 위한 추후의 선택지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반면 나스닥 상장의 경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까다로운 공시 요구와 현지 회계 기준, 집단소송 리스크 등 부담은 한층 더 무거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자본시장 심장부인 나스닥 진출은 기업가치 재평가 등 이점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시장에서는 “ADR 상장 필요성이 아예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간 삼성전자는 미국에 상장된 경쟁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았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ADR 발행은) 해외 시장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상장 자체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며 “ADR 발행을 검토할 가능성은 추후에도 열려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손재호 양윤선 박선영 기자 sayh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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