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의 진실... 야심가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한 이유
[이준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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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STORY <신삼국지> 방송화면 갈무리 |
| ⓒ tvN STORY |
그런데 유비는 왜 당시만 해도 변변한 경력 하나 없는 젊은 서생에 불과했던 제갈량을 위해 그토록 정성을 들인 것일까. 또한 제갈량은 왜 당대에 쟁쟁하던 수많은 군벌들을 놔두고, 하필 미래가 불확실하던 유비를 자신이 모실 주군으로 선택했을까.
제갈량이 '야심가'였다는 증거
지난 3일 방송된 tvN STORY <신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의 선택, 리더는 왜 유비였나' 편이 그려졌다.
서기 207년(후한 건안12년), 조조는 원소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북방을 평정하며 당대 중국의 최대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 무렵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북방에서 쫓겨온 이후, 황실 종친인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남방의 요충지인 형주를 통치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세력 확장보다는 현상 유지에 안주한 인물이었다. 유표는 유비 세력을 객장으로 받아들여 형주의 북쪽 접경지인 신야에 배치해 조조의 남하를 견제하려 했다.
당시 유비는 벌써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음에도, 라이벌 조조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동안 별다른 성과나 희망도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평생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던 유비가, 어느날 너무 오래 말을 타지 않아서 허벅지에 살이 많이 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자괴감을 느꼈다는 고백에서 유래한 고사가 비육지탄(髀肉之嘆)이다.
당시 유비 세력에겐 관우·장비·조운처럼 뛰어난 장수는 있었으나, 이들을 활용해 세력의 비전과 전략을 설계하고, 정치와 행정을 이끌어 줄 유능한 '책사(참모)'가 없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당대의 명사였던 사마휘(수경선생)와 서서의 추천을 받아 제갈량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는 과정을 한층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군 양도현 출신으로, 한나라의 사예교위(오늘날의 도지사겸 감사원장)였던 제갈풍의 후예다. 부친 제갈규는 태산군의 승(군청 서기)를 지낸 관료 출신 가문이었다. 제갈량은 어린 시절 부친을 여의고 숙부의 손에서 키워졌다.
서기 193년에서 194년 사이에서 조조의 서주침공으로 인한 대규모 제노사이드인 '서주대학살'이 벌어진다. 당시 10대 소년이였던 제갈량은 이 시기에 고향 서주를 떠나 전란을 피해 형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제갈량이 당시로서는 늦은 편인 20대 중반의 나이까지 출사하지 않은 이유도 서주대학살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 또한 나온다. 어린 나이에 일찍 난세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당시 민간인 대학살을 주도했던 패자 조조에 대한 반감과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출사를 꺼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제갈량이 언젠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세상에 드러낼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제갈량은 평소에 자신을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이던 관중이나 명장 악의에 스스로 비유했다고 한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아직 정식 프로 데뷔도 안 한 스포츠 유망주가 자신의 잠재력을 마이클 조던(농구)이나 리오넬 메시(축구)와 동급이라고 자처한 셈이다.
제갈량이 야심가였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은 형주의 명사이자 호족 출신으로 유표의 가문과도 연결돼 있었다. 유표의 아내인 채부인은 형주 최대의 호족인 채씨 가문 출신이었고, 채부인의 언니가 바로 황승언의 아내였다. 제갈량은 황부인과의 결혼을 통해 형주의 주류 호족 세력과 긴밀한 인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제갈량이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도, 신선같은 생활을 누리며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이유였다.
제갈량이 유비 제안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유비는 제갈량의 명성을 듣게 되자 영입을 위해 직접 그의 초가집이 있는 와룡강을 수소문해 찾는다. 당시 유비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던데다 후한의 '좌장군, 예주목, 의성정후'라는 고위 관직을 가졌으며, 황실의 종친이자 조조의 라이벌로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이런 유비가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에 능력도 검증 안 된 서생 한 명을 영입하고자, 아직 교통도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그 먼 길을 직접 찾아갔다는 것은, 당대든 현대 기준으로든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유비는 두 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방문하고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제갈량은 유비가 찾아올 때마다 자리를 비웠다. 제갈량이 일부러 유비를 피한 것인지, 우연히 길이 엇갈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헛걸음을 거듭한 유비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재가 절박했던 유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비는 제갈량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점쟁이에게 점을 쳐서 길일을 골라 3일간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다시 와룡강으로 찾아갈 준비를 했다고 한다. 관우, 장비 등 측근들의 강력한 반대도 물리쳤다.
연의에서는 삼고초려 끝에 대면하게 된 유비와 제갈량의 공식적인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유비가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드디어 집에 있었으나 하필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비는 제갈량을 깨우지 않고 일어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이를 본 장비가 분개해 제갈량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소란을 피우자 유비는 꾸짖어 물리쳤다. 그 사이 잠에서 깬 제갈량은 옷을 갈아입고 마침내 유비와 정식으로 대면하게 된다.'
실제 역사에서는 제갈량의 용모에 대해 '키가 8척(약 184cm)이고 얼굴은 관옥같으며, 머리는 윤건(비단두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도포)를 입었는데 세속을 완전히 초탈한 신선의 기개가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제갈량이 당당하고 범상치 않은 풍채를 지닌 인물이었음을 짐작케한다.
유비는 정중하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고 제갈량에게 영입을 제안한다. 제갈량은 막상 유비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제갈량의 진심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제갈량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유추해보자면 조조, 유표, 손권 등 당시 세력이 자리잡은 기존 군벌들 밑에서는 어차피 출사해봤자 얼마나 중용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반면 변변한 책사가 없는 유비 세력에서는 중용될 가능성은 높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 가까웠다.
이때만 해도 유비는 '한 황실 부흥과 조조 토벌'을 대의명분으로 일어났지만 현실은 아직 독자적인 영토 하나 없는 변방의 초라한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난세에 어떤 주군을 섬기느냐에 따라 자신과 가문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책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제갈량으로서는 먼저 유비가 과연 자신이 섬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 자신을 얼마나 인정해주고 중용할지부터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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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N STORY <신삼국지> 방송화면 갈무리 |
| ⓒ tvN STORY |
당시 중국의 핵심부로 불리던 중원은 조조가 장악한 화북지역(북중국)을 의미했고, 익주나 강동은 이때만 해도 개발이 덜 되고 인구도 적은 변방에 불과했다. 그동안 유비의 관심사는 중원의 조조를 토벌하고 후한 황실을 부흥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유비는 조조에게 대항할 생각은 있지만 구체적인 실현 비전이 없었다. 제갈량은 '먼저 체급을 키워 세력의 균형부터 맞추라'는 전략을 유비에게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제갈량의 이러한 구상은 훗날 위-오-촉 삼국시대의 개막을 통해 현실로 구현된다. 크게 깨달음을 얻은 유비는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답답하던 가슴이 활짝 열려 마치 짙은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는 듯 하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재능과 식견을 확인한 유비는 재차 간곡하게 영입을 호소한다.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와 거듭 진심으로 호소하는 유비의 정성과 인품에 감명한 제갈량 역시 "장군께서 저를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저도 견마지로(개나 말의 수고로움)를 다 바치겠다"며 마침내 유비의 책사가 되기로 수락한다. 당시 제갈량의 나이는 27세였다.
정사에 따르면,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늘 가까이 두고 숙식을 함께하며 정사를 논의할 만큼 남다른 신임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에 관우와 장비 등 유비를 오랫동안 먼저 섬겨왔던 심복들이 제갈량을 질투해 불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유비는 "나에게 제갈량이 있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가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다.
서기 208년, 조조는 마침내 북방 평정을 마치고 이제 천하통일을 위해 남쪽으로 창을 돌린다. 당시 형주는 유표의 사망 이후 후계자 분쟁에 휘말리며 혼란에 빠졌고, 유비 세력은 압도적인 규모의 조조군을 상대하게 돼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이에 제갈량은 강동의 손권과 연합해 조조와 대항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제안한다. 바로 삼국지 최대의 전투 중 하나인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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