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에게 '직장 내 괴롭힘' 신고했더니... 술집에 데려갔다
[이동철 기자]
▲ 아파트 경비 노동자 일러스트 [홍소영 제작] |
ⓒ 연합뉴스 |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 고용된 관리소장은 용역업체 경비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경비 업무에 대해 업무협조를 이유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비공식적으로 경비 노동자 계약 갱신 여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용역 업체 소속 경비 노동자들은 관리소장이 죽부인을 구매해 줄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해 출근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구매하자니 비용이 부담되고 거절하자니 경비 노동자 계약 갱신 여부에 대해 입주자대표회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리사무소장에게 밉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장의 갑질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시로 경비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사적 심부름을 시키거나, 휴무일에 등산을 함께 갈 것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직장 내 괴롭힘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직장에서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뒤늦게 근로기준법에 그 정의가 담겼지만 사실 '직장 내 괴롭힘'은 훨씬 이전부터 '갑질', '갈굼'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었던 직장의 고질적 병폐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 신설되기 전, 한국 사회에서는 재벌기업 경영자의 직원에 대한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2014년엔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서 자사 승무원의 땅콩 제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으로 승무원을 폭행하고 항공기 이륙을 지연시켜 처벌받은 조현아 상무의 땅콩회항사건이 있었습니다. 2017년 운전기사에게 쌍욕과 막말을 해 국민들을 놀라게 한 이장한 종근당 회장의 갑질, 그보다 앞선 2010년에는 지입차량 피해의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던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 방망이로 폭행하고 폭행의 대가로 돈을 건네 피해자를 조롱한 범SK가 최철원 대표의 맷값 폭행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이 노동 현장에 만연해 있다는 점이 수면위로 드러났고 그 심각성에 우리사회가 공감했습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직장 생활 경험이 있는 만 20세에서 64세 사이의 남녀 1506명을 대상으로 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3%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답할 정도였습니다.
2019년 7월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직장에서 괴롭힘이 발생할 경우 사업주에게 피해 근로자의 보호와 사실관계 조사를 통한 가해자 인사조치를 의무화한 규정도 만들어 졌습니다.
▲ 2019년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직장갑질119 관계자들이 설치한 관련 안내판 뒤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
ⓒ 연합뉴스 |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하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능력을 향상시키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보람을 느낍니다. 근로계약에 쓰여 있지 않지만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 노동자의 인격실현을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일터에서 일상화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노동자의 이직이 잦은 현실을 개선할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6년 10월 15개 산업 분야 근로자 3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기업의 인건비 손실을 연간 5조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이직 등 기업의 인건비 손실을 방지하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합쳐져 탄생한 것이 근로기준법의 직장 내 괴롭힘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의 시행 이후 노동현장에서의 현실은 어떨까요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용노동지청에 신고된 사건은 1만28건이었습니다. 2019년 법시행 이후 2130건에서 출발해 2020년 5823건, 2021년 7745건, 2022년 8961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루 평균 26건의 직장 내 괴롭힘이 신고 되고 있습니다.
상담사례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이 주로 하소연하는 내용은 업무에 대한 부당한 평가와 모욕적 발언입니다. 사업주나 상사가 객관적 평가 기준이 아닌 주관적 이유로 피해자 노동자의 업무능력이나 성과를 부당하게 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상사에게 비아냥거림과 조롱 섞인 말투로 모욕을 당했다며 피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도 상당합니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 중 50인 미만 소규모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15세 이상의 취업한 국민들 약 5만 명을 대상으로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조사하는 근로환경개선 조사(2020) 결과도 이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조사 대상 가운데 언어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한 2725명 중, 67%인 1827명이 50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였습니다.
이처럼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와 피해자 간 접촉이 빈번하여 괴롭힘 문제가 더욱 심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설립 가능성이 낮은 3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노사협의회나 고충처리위원회를 구성할 의무가 없어 피해 노동자가 문제해결 과정에서 조력자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이 아예 적용되지 않습니다.
▲ 영화 <날아라 펭귄> 스틸컷 |
ⓒ 국가인권위원회 |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의 적용을 제외한 이유는 영세사업장의 열악한 현실과 국가의 근로감독능력 한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취약 사업장 노동자들을 법과 제도가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실제 영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해결 과정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경상남도의 어느 영세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피해 노동자는 상사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참다못해 사업주에게 상사의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는데 경악할만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피해 노동자의 고충을 듣고 사업주가 "서로 쌓였던 오해를 풀자"라며 퇴근 후 술자리를 마련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자리에 부른 것입니다. 다음 날 조회 자리에서 사업주는 가해자의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언급하고 "둘이 한잔하고 화해했다"라며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악수까지 시켰습니다.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피해 노동자와 가해자의 분리 조치, 피해 노동자의 의견을 듣고 유급휴가 등을 부여하는 등 적절한 보호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피해자 보호와 사실관계 조사 등의 의무를 기업에만 맡겨 놓아서는 피해 노동자에 대한 적절한 보호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인권위의 권고대로 지금이라도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의 적용을 확대하길 바랍니다. 영세한 기업의 부담을 고려해 직장 내 괴롭힘의 발생으로 인한 사실관계 조사는 노동위원회에 일임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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