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이' 가고 '채린이' 온다..저쿠폰 채권, 투자 암흑기 '한 줄기 빛'
“잘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최근 만난 한 대형 증권사 A대표는 최근 증권업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증시 환경은 최악에 가깝다. 미국의 연이은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으로 높은 금리를 좇아 국내 증시에서 자금이 빠져나간다. 최근 코스피는 하락세를 거듭하며 2200선마저 내줬다.
주식이 하향세를 거듭하자 거래량은 뚝 떨어졌다. 지난해까지 증권사 실적에 크게 기여했던 수수료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조달 금리가 높아지며 증권사의 각종 투자 프로젝트가 멈춰 섰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불거진 불완전 판매 이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면으로 보나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A대표는 한 가지 비즈니스만큼은 ‘호황’이라고 했다. 바로 채권이다. 정확히 말하면 ‘개미’들의 채권 투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승장에 몰려들었던 ‘주린이(주식 초보자)’처럼 ‘채린이(채권 초보자)’가 늘어간다는 설명이다.

▶개인들, 역대 최대 순매수
▷주가 폭락하며 안정성 무게
채권 시장 성장세는 숫자로 나타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9월 기준 개인들은 장외 채권 시장에서 14조원 넘게 순매수했다. 지난해 한 해(4조5675억원) 대비 200% 증가한 수준이다. 금융투자협회가 해당 통계를 집계한 이래 가장 큰 순매수 규모기도 하다.
반면 주식 시장 대기금인 투자자예탁금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연초 71조7328억원에 달했던 자금이 최근 50조원대로 급락했다. 무려 20조원이 9개월 만에 빠져나간 셈이다. 미국의 강한 긴축 정책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에서 꾸준히 이탈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개인들이 ‘단기 채권’에 관심을 쏟는 현상도 두드러졌다. 회사채 투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올해 들어 은행을 제외한 기타금융채를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개인들은 올해 기타금융채를 4조3410억원 순매수했는데, 지난해 순매수 규모는 4839억원에 불과했다. 무려 약 10배가 늘어났다. 1년 만기 안팎의 카드채를 찾는 투자자가 급증한 영향이다. 카드채 1년물 수익률이 연 4%를 웃돌자 단기 투자 성향의 강한 개인 투자자가 옮겨 가고 있는 셈이다.
단기채 판매가 늘어나며 주요 증권사별 리테일(소매) 채권 판매 금액은 연일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최근 신한투자증권과 KB증권은 개인 투자자 비중이 큰 리테일 채권의 올해 판매액이 10조원을 돌파했다. 삼성증권이 지난 8월부터 판매했던 만기 1~3년의 월이자지급식 여전채(여신전문금융회사채)에는 1000억원대 자금이 몰려 2주 만에 완판됐다.

▶매매차익 노린 투자 급등
▷저쿠폰 채권 완판 행진
채권은 기본적으로 안정성이 무기다. 발행 시점에 만기와 이자가 정해지고 주식 대비 상대적으로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다.
구체적으로 보면 채권 투자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자소득(쿠폰)이다. 최근 각국 중앙은행의 잇단 금리 인상으로 채권 금리가 크게 뛰었다. 신용 리스크 프리미엄이 붙는 회사채 이율은 4%에 육박한다. 리스크 프리미엄이 가장 낮은 축에 드는 국고채 금리도 3%에 바짝 다가섰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향후 몇 차례 더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 채권 시장금리는 이를 상당 부분 선반영해 장기적 관점에서 지금 금리는 높은 수준이라는 게 시장 시각이다. 따라서 지금의 ‘높은 이자’를 즐겨 볼 여지가 있다.
둘째는 매매차익이다. 채권은 현금흐름인 이자가 고정됐다. 반면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지금은 금리 인상에 따라 채권 가격이 빠질 만큼 빠졌다. 이 때문에 수년 전 저금리 구간에서 상대적으로 비싸게 발행됐던 채권이 현재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 중이다. 이런 채권을 매수해 만기까지 보유하면 매매차익(액면가-시장가)에 이자수익까지 노릴 수 있다.
이자수익에는 15.4% 이자소득세가 붙고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매매차익에는 따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매매차익은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이런 이유로 할인된 국고채 등을 매수해 만기까지 보유한다면 실질수익률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최근 ‘저쿠폰’ 채권에 자금이 몰리는 것도 매매차익과 관련 깊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9월 16일까지 표면금리 3% 이하 저쿠폰 채권 판매 규모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3배에 해당하는 2조6000억원에 이른다. 삼성증권 예탁 자산 30억원 이상인 초고액 자산가들의 경우 저쿠폰 채권 매수금액이 전년 대비 6.4배 증가했다.
과거 저금리 시기에 낮은 표면금리로 발행된 저쿠폰 채권은 최근 금리 상승으로 채권 가격이 액면가 대비 많이 떨어졌다. 매매차익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의미다. 채권 투자로 얻어지는 수익 중 이자소득세를 내는 이자수익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 절세에 유리하다. 전문가들은 저쿠폰 채권이 절세 측면에서 연 2~3%포인트 수익률이 높을 것으로 분석한다.
백혜진 삼성증권 상무는 “고액 자산가를 중심으로 세전 연 4%대의 안정적인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고쿠폰 채권과 더불어 세금 부담을 낮춰 세후 실질소득률을 높일 수 있는 저쿠폰 채권 매수를 병행하는 채권 포트폴리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했다.
▶채권 ETF 라인업 풍부
▷모바일로 채권 거래 가능
증권사들은 폭증한 채권 수요에 따라 상품 라인업을 새로 짜고, 모바일 거래로 투자 편의성을 높이는 등 전열을 정비 중이다. 삼성증권은 지난 8월 국내 증권사 최초로 월이자 지급 채권을 판매했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AA)이 발행한 만기 1~3년, 세전 수익률 연 3.7~4.4%의 여전채로 지난 9월 1400억원어치가 완판됐다. 대략 1억원을 투자하면 1년간 매달 세후 약 30만원을 수령할 수 있는 채권이다.
한국투자증권도 뒤이어 롯데캐피탈(AA-), 엠캐피탈(A-), 오케이캐피탈(A-) 등 800억원 규모의 월지급식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롯데캐피탈의 세전 이율은 연 4.6%, 엠캐피탈은 연 5.02%(비대면 뱅키스 전용), 오케이캐피탈은 최대 연 5.21%다. 키움증권은 세전 연 4.48%의 이자를 월마다 주는 메리츠캐피탈 여전채를 9월부터 판매하고 있다.
상장지수펀드(ETF) 등 채권 간접 투자 상품 라인업도 풍성해졌다. 국내 운용사 가운데 가장 많은 채권 ETF 라인업을 보유한 KB자산운용을 필두로, 신한자산운용이 국고채 3년물과 10년물에 각각 투자하는 ‘SOL 국고채3년’ ‘SOL 국고채10년’을 상장시켰다. 앞서 키움투자자산운용은 단독으로 물가연동국채에 투자하는 ‘KOSEF 물가채KIS’를 지난 5월 선보였다.
채권 투자 장벽도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증권사들은 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에서 회사채나 신종자본증권 등 채권을 살 수 있게 서비스 중이다. KB증권은 온라인 채권 거래 메뉴를 개편했다. 삼성증권은 해외 채권 모바일 거래를 론칭했다. 서비스 일주일 만에 판매규모가 60억원을 돌파했을 만큼 인기다.
[명순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8호 (2022.10.05~2022.10.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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