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구출 앞장, '옥중 순국' 민족대표가 외친 것

이돈삼 2026. 2. 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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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은 뜻... 지강 양한묵 선생이 잠든 화순 앵남마을

[이돈삼 기자]

 하루 여덟 번 열차가 지나는 앵남 철도 건널목. 철길 너머로 광산이씨 사당과 전남학숙이 보인다.
ⓒ 이돈삼
"댕-댕-댕-"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온다. LED 경보등도 번갈아 깜박인다. 건널목 관리원이 서둘러 밖으로 나와 차량 통제에 나선다.

잠시 뒤,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난다. 옛 기억 속의 기다란 열차가 아니다. 달랑 세 량을 이끌고 있다. 금세 차단기가 올라가고, 경보등도 일상으로 돌아가 잠잠해진다. 다시 평온해진다.

"하루 여덟 번 지나는 기차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선, 광주송정역에서 출발해 순천 방면으로 가는 거예요. 옛날엔 기차도 자주 다니고 북적거렸을 텐데, 지금은 기차 구경이 힘들 정돕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죠."

김우식 철도 건널목 관리원의 말이다. 철도 건널목은 옛 앵남역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옛 앵남역은 남평역과 화순역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앵남역은 2008년 1월 폐지됐다. 지금은 간이역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옛 산간 마을에 자리한 앵남역사는 직사각형 콘크리트 집이다. 역 이름과 함께 이전 역, 다음 역을 알려주던 회색빛 나무 안내판도 사라지고 없다. 언뜻 시골 마을의 버스정류장처럼 생겼다. 앵남역은 1932년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부침을 겪긴 했지만, 늘 서민과 애환을 함께했다. 1980년대 후반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열차 이용객이 줄면서 존폐의 갈림길에 섰다. 2006년 사람이 타고 내리는 역의 역할이 중단됐다. 앵남역이 생긴 지 74년 만이었다.

앵남마을
 옛 앵남역과 경전선 철길. 앵남역사가 흡사 버스정류장 같다.
ⓒ 이돈삼
옛 기억 속의 앵남역이 앵남(鸚南)마을에 있었다. 화순 앵무산 자락에 둥지를 튼 마을이다. 앵무산 아랫마을 앵무동(앵무촌)을 비롯 화남과 신기촌, 쌍계동 등 4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앵남'은 앵무촌(鸚鵡村)과 화남(花南)에서 한 글자씩 따 붙였다. 지난 21일과 22일, 이곳을 찾았다.
앵남마을은 화순군과 나주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화순읍과 남평읍의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와도 지척이다.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에 속한다.
 화순 앵남마을. 복숭아 과원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꽃마을을 이룬다.
ⓒ 이돈삼
 화순 앵남마을에 있는 광산이씨 사당. 광산이씨의 자긍심이다.
ⓒ 이돈삼
철도 건널목에서 보이는 도로변 옛집이 고풍스럽다. 비석도 줄지어 있다. 광산이씨 사당과 승지공비(承旨公碑)다. 1576년 세운 승지공비는 이달선의 묘비다. 비문에 광산이씨와 이달선의 행적이 희미하지만 빼곡히 적혀 있다. 비문은 귤정 윤구와 율곡 이이가 지었다.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당대의 명문장가와 명필의 조합이 별나다.

이달선(1475∼1506)은 홍문관과 수찬, 의정부 사인, 승정원 좌부승지를 지냈다. 고려사 바로잡기 작업과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광산이씨 시조 이순백의 6대손으로 홍문관 제학을 지낸 필문 이선제의 손자이자, 전라감사 이중호의 할아버지이다.

소문난 맛집도 옆에 있다. 황토로 한껏 멋을 낸 식당이다. 갈치조림과 쌈밥을 차려낸다. 큼지막한 갈치에다 무, 감자, 말린 고구마순이 어우러진 갈치조림이 별미다. 식당 곳곳에 전시된 옛 생활유물도 볼거리다.
 광산이씨 승지공비(承旨公碑). 이달선 묘비다.
ⓒ 이돈삼
 앵남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 경전선 철길과 전남학숙이 한데 어우러진다.
ⓒ 이돈삼
저만치 전남학숙도 보인다. '전남학숙'은 전라남도가 광주광역시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전남출신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위해 세운 기숙사다. 2명이 같이 쓰는 생활실을 비롯 독서실, 체력단련실, 멀티미디어실, 세탁실 등을 갖추고 있다. 맘껏 뛰놀 수 있는 운동장도 있다.

전남학숙 입사비는 매달 11만 원. 하루 세 끼 식사는 물론 통학버스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장학금 지급, 국내외 견학과 체험 등 혜택도 다양하다. 광산이씨 승지공비와 전남학숙 앞을 지나는 도로가 '지강로'로 이름 붙여져 있다. 지강 양한묵(1862∼1919) 묘도 가까이 있다. 전남학숙 뒤편 앵무산 자락에 제주양씨 선산이다.

인내천을 외친 민족대표
 지강 양한묵의 묘. 앵남마을 제주양씨 선산에 모셔져 있다.
ⓒ 이돈삼
양한묵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작성에 천도교를 대표해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해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나이 56살이었다.

양한묵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고,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유일한 민족대표였고, 호남 사람이었다.

양한묵은 인내천(人乃天)을 외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은 양한묵이 쓴 <대종정의>에 언급돼 있다. 그는 신분 차별이 용인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을 꿈꿨다. 양한묵이 동학에 참여한 이유다. 장흥과 보성에서 잡혀간 동학농민군 구출에도 앞장섰다.

양한묵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며 운동단체 창립도 이끌었다.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 등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했다. 1905년엔 이준 등과 공진회를 조직해 일제에 맞서다 옥고를 치렀다. 1911년엔 기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운영하며 항일 정신교육에, 낙향해선 신학문 보급에 앞장섰다.

양한묵 추모비가 화순 남산공원에 있다.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엔 생가와 순국비가 있다. 서대문형무소의 겉모양을 본뜬 조그마한 기념전시관도 만들어져 있다.
 지강 양한묵 추모비. 화순 남산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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