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진압했다며 잔치를 벌인 왕

이영천 2024. 9. 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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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그 이후 '대 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한 사람들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침략적 외세, 특히 일제에 저항할 어떤 세력도 남아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니 조선은 무주공산이다. 침 흘리는 늑대 앞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내놓인 가련한 어린 양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 벌어진다.
▲ 만석보 터 고부봉기의 원인이 된 만석보.
ⓒ 이영천
동학혁명이 막을 내리자,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을까? 아니면 잔치를 베풀어 이를 축하했을까? 불행하게도 후자였다.
갑오개혁 정권은 '일군만민'의 이상을 내건 동학농민혁명을 압살하면서도, 농민군의 요구를 대부분 정책화했다. …(중략)… 대부분 공문구가 되고 말았다. 결국 갑오개혁은 민중의 염원에 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청일전쟁의 일환이기도 했던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대축하연에서 만세를 서로 화창했다는 사실이 잘 상징하고 있다.

고종이 양국 군 장교를 접견한 후 개최한 축하연 자리에서 쿠스노세 중좌가 '이노우에 공사의 명령을 받아 먼저 일본 장교 일동을 대신해 황공하게도 조선의 대군주 폐하께서 이러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모인 사람이 모두 대군주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그에 호응해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하자, 일동이 또다시 만세를 삼창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전날 조일 양국 군이 서울로 개선했을 때 고종이 칙사를 보내자, 그 자리에서 '동학당 정토군지휘관'인 일본 육군 소좌 미나미 코시로의 선창으로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 만세'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했었다. (민중과 유토피아. 조경달. 허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2009. p139~140)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수십만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데, 잘 죽였다며 축하연을 열어 만세 부르는 기이한 장면에 아연 넋이 나갈 정도다. 그것도 국왕이라는 사람에 의해. 여기에 박영효가 '대 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니 더욱 기막힐 노릇이다.
▲ 말목장터 고부봉기 발상지
ⓒ 이영천
양반으로 임금 사위이자 벼슬아치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로, 일본에 망명한 후 전봉준을 심문한 서광범과 함께 귀국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한 인물. 을사늑약 후에는 후작으로 봉해져 일본 귀족으로 한평생 호의호식한 악질. 우린 왜 이런 인물 하나 제대로 징벌하지 못했을까?

갑오개혁과 그 한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어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왕권을 약화하고, 자주적 개혁 세력 제거에 나선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이익을 서서히 늘려나가는 정책을 강요한다.
▲ 무장 기포지 1차 봉기가 일어난 곳.
ⓒ 이영천
청일전쟁 때 구축한 병참선을 십분 활용 한반도를 장악해 나간다. 개항을 압박·강제하여 질 좋고 값싼 쌀과 농산물을 착취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한다. 이로써 일본 군수산업 공업화의 초석으로 삼는다.
갑오개혁을 이끈 정권은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정권 내부에도 급진파와 온건파가 공존하면서, 청과의 오랜 종속관계 청산을 두고 대립한다. 정치체제도 입헌군주제와 부분적으로 제한된 전제적 왕권 유지로 맞선다. 농민군이 주장한 토지 분작은 손도 대지 못했고, 세금의 금전 납부라는 부분적 개량조치에 머물고 만다.
▲ 백산 포고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 이영천
근본적인 한계는 구체제를 온전히 존속시켰다는 데 있다. 성문법에 기초한 개혁조치 단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청일전쟁 승자인 일본의 한반도 침탈에 일조한 정권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첫째, 군국기무처를 통한 유사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갖추는 시늉이라도 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왕이 주관적·임의적으로 행사하던 통치권이 성문법에 기초한 제도적 통치로 전환할 최소한의 형식이나마 갖추었다. 성과는 없었으나 이로써 토지 및 신분제도 개선, 지벌타파, 인재등용, 세제개편, 은(銀)본위제 확립 등이 개혁조치로 반포되었다.

둘째, 법·제도적인 직제와 재정 관리체계 확립이다. 정부 관제를 내각제 형태로 개편하고 운영 규칙을 마련했다. 각 관직에 부여되는 권리가 관리의 특권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직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직책 수행의 일반규칙을 마련했다. 또한 세금으로 거둬들인 모든 수입을 중앙 집권화하여 총량적으로 관리하고, 나라와 왕실의 재정 관리의 제도화를 통한 객관적이고 명문화된 규정에 따른 재정지출이 이뤄지도록 하였다.
▲ 황토현 전투 관군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둔 곳.
ⓒ 이영천
이 둘을 통해 관료제의 확립을 명문화하였다. 물론 이러한 갑오개혁 조치들 모두가 실효성 있게 집행된 건 아니다.

이후의 조선

일본은 청일전쟁에 박영효를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공사관 오토리 게이스케가 추천하는 형식으로 갑신정변 죄를 사면하여 귀국시킨다. 배후엔 흥선대원군을 견제하려는 왕후의 면죄부가 있었다. 정계에 다시 등장한 박영효는 태풍의 눈이었다.
▲ 황룡강 전투 홍계훈의 중앙군을 장태를 앞세워 무찌른 곳.
ⓒ 이영천
그런데 그 무렵 흥선대원군 손자인 '이준용 옹립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써 대원군은 세력을 잃고 권력에서 멀어진다. 이 틈을 노린 일본의 개입으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1894.12)하는데, 이때 박영효가 등장하여 김홍집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 풍남문 전주성을 함락한 상징으로 남은 전주 랜드마크.
ⓒ 이영천
1895년 박영효는 왕후를 등에 업고, 이준용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빌미로 김홍집과 대립한다. 결국 김홍집을 실각시켜 정권을 장악한다. 박영효는 총무 대신 서리를 거쳐, 새로 수립된 박정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어 여러 개혁조치를 내놓는다. 왕후가 배후 조종한 '을미개혁'이다.
이는 행정, 사법, 군사, 교육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일본보다는 서양, 특히 러시아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일본이 끊임없이 박영효를 견제하자, 그럴수록 왕후는 더욱 러시아와 가까워진다. 때마침 '3국 간섭'으로 일본이 뒤로 한 발 물러나자,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왕후의 친러 행각은 더욱 노골화 한다.
▲ 원평 집강소 백성 자치기구인 집강소. 이름도 없는 백정이 기부한 원평집강소.
ⓒ 이영천
한편 박영효는 개인적인 한계인지 아니면 무모한 권력욕 때문이었는지, 주위의 질시를 받아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른다. 설상가상 반역에 연루되어 일본공사관을 통해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 빈자리를 친러세력이 차지하고, 왕후는 일본에 대한 끝없는 적개심으로 러시아에 밀착하다시피 한다. 자신의 권력 유지가 주목적이었겠으나, 갑오년 여름 일제의 경복궁 침탈이 큰 요인이라 알려져 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여우 사냥'이란 작전명으로 중대 범죄를 저지른다. 권력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1895.10.08)'을 일으킨다. 아울러 고종을 감금 상태로 만들어 나라의 모든 일을 일본에 유리하게 만들어 갔던 것이다.

감금 상태에 있던 왕을 피신시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던 춘생문사건이 일어났으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그 결과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다시 일본의 손으로 구성되었고, 일제에 의한 단말마적 개혁은 계속 이어진다.

태음력을 버리고 태양력을 채택하고 연호를 제정하였으며 군대를 이원화하여 친위대와 진위대로 개편한다. 아울러 단발령을 내렸다. 왕후 살해와 단발령으로 보수·수구적인 유림과 위정척사파가 강력히 반발한다.
▲ 삼례 2차봉기 삼례에서 반외세의 기치로 재 봉기한 동학혁명군의 상징.
ⓒ 이영천
저항 수단으로,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다지 큰 저항력을 보여주지 못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과 친위대가 지방 각지로 빠져나가면서 한성을 비롯한 궁궐 수비가 매우 허술해지게 되었다.
이 빈틈을 활용,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02)'이 일어난다. 아관파천으로 3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왕명에 따라 김홍집 등 여러 관리가 피살당한다. 친러·친미 성향의 정동파가 득세하면서, 이들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형식적이고 표면적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개혁을 표방했던 정책들이 중단되고, 한반도는 다시 러시아와 일본을 필두로 한 침략적 제국의 이권 쟁탈 각축장으로 빠져들어 갔다.
▲ 우금티 전투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끝내 좌절된 혁명의 꿈.
ⓒ 이영천
아관파천 후 왕정을 상징하는 의정부 제도가 부활한다. 고종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받아들여 스스로 황제로 즉위(1897.10.12)한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표방한, 황제독재체제 대한제국이 원구단에서 선포되고 탄생하였다. 형식은 달랐지만 모든 것이 여흥민씨 세도정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1893년 체제로 복귀한 셈이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버려가며 이루고자 했던 반봉적·반외세라는 자주 국가의 꿈이 연기처럼 사라진 순간이다. 나라는 그렇게 망국의 길을 걷고 만다.

덧붙이는 글 | 2023년 9월에 취재에 나서고 12월 첫 기사를 내 보냈으니, 근 1년 간을 동학농민혁명을 껴 안고 지냈다. 이번 40번째 기사를 끝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024년 9월, 지금의 한반도는 꼭 130년 전 그때를 보는 듯 하다.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를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되 짚어 보고 지혜가 발휘되기를 빌어 본다. 아울러 그 동안 성원해 주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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