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장 김원봉 서훈 쟁점

김삼웅 2025. 11. 1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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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논쟁과 쟁점 55] 조국(남북)은 김원봉게 많은 빚을 졌다.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그에게 서훈을 해야 할 것이다

[김삼웅 기자]

 약산 김원봉.
ⓒ 독립기념관
한국의 항일 독립운동사에는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존재로서 폭렬투쟁의 빛나는 깃발이 꽂히게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규식과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혁명당의 참여로서 좌우합작의 큰 울타리를 치게 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과 의열단의 존재가 없었다면 얼마나 초라했을까, 임시정부가 해방되는 날까지 한독당 중심의 우파정당 일색이었다면 얼마나 옹색했을까를 생각할 때 김원봉의 존재는 더욱 빛난다.

남한(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고, 해방과 함께 환국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헌신하다가 쫓겨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비운의 사나이. 그의 생애는 20세기 전반기 동북아 질서의 축소판이고, 그의 운명은 같은 시기 한반도의 분단사와 친일잔재와 적색 독재가 남긴 트라우마이다.

독립운동과정에서 무수한 지사들이 신명을 바쳐 일제와 싸우다가 희생되어 민족사에 큰 별이 되었다. 그분들의 헌신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되고 당당한 독립국가로서 20세기 중반에 세계사의 일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성좌중에서 김원봉이 차지한 별자리는 남다르다.

김원봉은 무장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의열단을 조직,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투쟁을 벌이고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중국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고 독립운동 간부들을 육성하였다. 김규식 등과 민족혁명당을 창당한데 이어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한국독립운동사에 고딕체로 기록되는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杷虎門)밖 중국인 농민 반(潘)씨 집에 조선청년 10여 명이 모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정의'의 의(義)자와 '맹렬'의 열(烈)자를 따서 '의열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김원봉을 단장(의백)으로 하는 13명의 청년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공약 10조'로서 조직의 기율을 정했다.

의열단은 3·1혁명이 좌절되면서 폭렬투쟁을 통해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결의로 창립되었다. 김원봉을 비롯하여 창립멤버 13명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마땅히 죽여야 할'대상 곧 '7가살(七可殺)'을 적시했다.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수뇌
3. 대만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토호열신(악덕지방유지)

의열단의 폭렬투쟁은 3·1혁명 이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조선청년들의 의기에 불을 부쳤다. 수많은 청년들이 의열단에 속속 가입했다.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 는 의열단원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이런 경우에도 결백할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 입었다."

의열단의 폭렬투쟁이 일반 테러사건과 다른 것은 신채호가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을 통해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라고 주장, 일제를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민중의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김원봉의 행적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직 목표를 조국 독립에 두고 활동하였다. 중국 국민정부와 제휴하여 혁명간부학교를 개설한 것을 비롯하여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1935년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부장에 취임한 것 등은 정세의 변화에 따른 정치투쟁으로의 노선변경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은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내다보면서 일제 패망에 대비하였다. 민족혁명당은 1943년 2월 제7차 대표자대회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좌우세력의 통합기구로서 한국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 김원봉 등 수뇌부는 일제 패망이 머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1943년 4월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수를 14명으로 증원하면서 통일전선 내각을 구성하였다. 통일전선 내각은 한국독립당의 김구 주석,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하고 한국독립당의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박찬익·안훈·조소앙,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장건상·김붕준·성주식, 조선혁명자연맹의 유림,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좌우, 중도세력이 모두 참여하는 거국내각 또는 전시내각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군했다. 김원봉은 1942년 5월 18일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1지대로 개편되고, 광복군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에 부사령관직의 증설을 결의하고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맞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은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합작이고,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합작이었다. 이것은 바로 독립운동 좌우 진영의 통합을 상징한다.

미국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인하고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토록 하여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가정이지만 환국한 임시정부가 정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면, 좌우 세력의 연합체로서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는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다. 1946년 9월 21일 영남항쟁 조사단장으로 활동 중에 서울성북서 경찰관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1947년 3월 하순에는 포고령 위반 혐의로 미군정경찰에 피검된데 이어 8월에는 가택이 피습당했다. 1947년 3월에는 친일파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에 유치되었다.

김원봉은 이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고 풀려나와서 3일 동안 통한의 눈물을 뿌렸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수가 있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1948년 4월 9일 김원봉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남쪽에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 등이, 북한에서는 김일성·김두봉 등 정당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연석회의는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입북했던 김구 등은 내려왔으나 김원봉은 평양에 눌러 앉았다.

북한 체류와 관련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남한에서 테러 위협과 신변 불안, 단독선거로 남한에서 정치적 활동공간 확보의 어려움,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 북한에서 활동중인 예전 동지 연안파들의 만류 등이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1958년 11월 그의 이름은 북한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숙청설 등 갖가지 소문이 따르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김원봉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혁명가의 생애가 그렇듯이 김원봉은 특히 그랬다. 그의 가족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는 굶어죽었다.

조국(남북)은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남북에서 억울함과 한을 품고 사라져간 그에게 겨레는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 많이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그에게 서훈을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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