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출귀몰 평민 의병장 신돌석

김삼웅 2024. 12. 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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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27]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삼웅 기자]

 경북 영덕 신돌석 유적지 내 신돌석 초상
ⓒ 신돌석유적지
영해에서 승리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 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 부대에 규모를 강화하여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 백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한 대목이다.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 복평마을에서 아버지 신석주와 어머니 분성 김씨 사이에서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본래 이름은 태호 (泰鎬)이고, 어릴 때 돌선(乭先)이라 불리다가 돌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말 초기 의병장이 대부분 유림 출신인 데 비해 그는 평민 출신으로 의병에 나서고 신출귀몰한 활동으로 명성을 날린 드문 사례이다. 평민 신분인 데도 아버지의 지극한 학구열로 이웃 양반촌 마을의 이중립에게 글을 배웠다. 짧은 기간의 공부였지만 남긴 시문으로 봐 대단히 영민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많은 액수의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8세 되던 1896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을미의병이다. 고향 영해에서도 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전부터 활빈당에서 활동했다고 하지만 입중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는 10대에 의병전에 참가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영해의병과 영덕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다. 1896년 7월 13일 영덕대교 부근 남천전투에서 연합의병이 크게 전과를 거두었다. 영해의병과 영덕의병이 연합하여 얻은 전과였다.

"여러 정책으로 미뤄 볼 때 아마 신돌석도 영덕의진에 속하여 이 전투에 참가했을 터이다. 영덕의진은 김하락이 죽고 나서도 8~9월까지 간헐적인 전투를 치렀으니, 신돌석도 계속 활동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주석 1)

그동안 신돌석에 관한 연구는 부진한 상태였다. 여러 이유 가운데 평민출신이어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기와 후기에 영덕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은 대체로 1896년부터 1909년까지 항쟁을 펼쳤다. 그 가운데 신돌석이 이끄는 의진이 단연 눈에 두드러졌다. 신돌석은 1906년 4월(양력)에 시작하여 순국한 1908년 12월까지 2년 8개월 동안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오르내리며 활약했는데, 이후에도 그의 잔여 세력이 1809년까지 곳곳에 산발적인 항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주석 2)
 경북 영덕 신돌석 생가
ⓒ 정만진
신돌석은 남천루 전투 끝에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 관의 추적을 피하고 재기를 위해 정신적·실제적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기(1904년) 영해의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문에 그의 심회가 담겼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
낙목의 가로수는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를 느끼네. (주석 3)

일제의 조선 침략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외교권을 강탈당하는 등 국권을 유린하였다. 그는 더 이상 앉아서 시국을 개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향 마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00~300명 규모였다. 영릉의병이고 자신이 의병장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신돌석 의병은 영양→청송→청운역→진보읍→청송 이전평을 넘나들면서 전과를 올리고, 삼천의진과 연합하여 울진의 일본인을 습격했다. 그리고 울진관아를 점거한 데 이어 7월 3일 영해읍성을 공략했다.

의병 100여 명이 동헌에 돌입하여 군수를 끌어내어 죄상을 논하고, 각 공해(公廨)를 부숴 군물을 압수했으며 삼공형(三公兄, 아전)을 붙잡아 진중으로 구인하였다. (주석 4)

그의 의병전은 계속되었다. 전직 주사 백남수가 합류하면서 세를 키우고 울진관아를 공략한 후 1907년 9월 15일 영양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1월에 봉화와 순응관아를 공격하는 등 신출귀몰하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관군과 일본군을 타격했다. 일본군은 전략을 바꾸었다. 신돌석의 부인을 이용하여 회유전략을 폈다.

일본군은 신돌석의 가족을 수소문하여 그의 아내 한재여를 찾아냈다. 당시 한씨 부인은 세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진보군 동면 화애동에 피신해 있었다. 이곳은 그의 둘째 시누이가 시집가서 살던 곳이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인 마츠오가 3월(음력 2월) 한복으로 변장한 뒤 한인 3명을 앞세우고 와서 한씨 부인을 붙들어갔다. (주석 5)

일본군은 한씨 부인을 억류하고 부인을 통해 투항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신돌석은 "왜놈의 편지를 갖고 찾아왔느냐"고 호통을 치며 편지를 찢어버렸다. 일제는 '귀순법'을 공포하여 의병이 귀순하면 면죄한다는 등 의병진영을 교란시켰다. 신돌석 의병 부대도 이탈자가 생겼다. 거듭되는 전투로 병사들이 많이 지치고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쇠약해졌다. 만주로 이동을 구상하는 등 활로를 찾았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많은 병력을 풀어 그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1908년 12월 11일 밤, 그가 영덕군 북면 눌곡에 은거한 것을 탐지했다. 그는 이곳에서 피살되었다. 그의 목에는 1,000근의 금과, 1만 호의 고을을 준다는 현상이 붙어 있었다. 살해범은 김상렬·상태·상을 3형제 설, 귀순한 김도윤 형제 설이 따른다.

<황성신문>은 "폭도 괴수 신돌석은 제작일 오후 6시에 영덕군 북면 돌옥동에서 동인에 투석함을 인해 후뇌부에 중상을 수하여 인즉치사 하였다"고 보도했다. 시신은 가 매장 상태이다가 1971년 서울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주석
1>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44쪽, 푸른역사, 2001.
2> 앞의 책, 22쪽.
3> 앞의 책, 51쪽.
4> <황성신문>, 1906년 5월 22일.
5> <의병대장 신공유사>, 김희곤 앞의 책, 16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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