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가방' 승부수 통했다…수요일마다 '분크'가 7년째 한 일 [비크닉]
■ b.멘터리
「 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그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
‘똘똘한 한 채’를 노리는 부동산 시장만큼 양극화가 두드러진 곳, 아시나요. 바로 핸드백 시장입니다. 명품 소비가 폭발한 코로나19를 계기로, 럭셔리 아니면 차라리 에코백을 고르는 소비 패턴이 심화됐어요. 중가의 국내 백화점 브랜드가 설 자리를 점점 잃어 갔고요. 게다가 지난해 상반기 1인당 가방·지갑 평균 구매는 1.37개(본인 착용)에 불과해요(한국섬유산업연합회 보고서). 아무리 좋아하는 브랜드라 해도 연거푸 사지 않는 것 역시 핸드백 구매의 특징입니다. 브랜드 입장에선 고객이 지갑을 열기까지 엄청나게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2018년 등장한 핸드백 브랜드 ‘분크’는 이런 시장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이름입니다. 디자이너 개인이 론칭한 지 6년 만에 매출은 440억원까지 훌쩍 뛰었고(2024년 추정), 온·오프 채널만 29곳, 이달엔 인천공항 면세점(T2)까지 열었습니다.
최근엔 해외도 넘보고 있어요. 지난 7월 일본 공식몰 오픈을 시작으로 지난달에는 오사카 한큐 우메다 백화점에서 팝업을 선보였어요. 장기적으로는 해외 시장을 노리며 각국의 면세점 입점을 준비 중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위기라는 시장에서 입지를 다진 분크만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디지털 시대를 사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정공법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비크닉에서 짚어 봅니다.
온라인 쇼핑의 핵심은 ‘기억’보다 ‘검색’
트렌드·품질·가격. 삼박자를 고루 갖춘 K패션이 최근 해외에서 날개를 달았습니다. 분크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달 10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공식몰 론칭 기념행사에는 비공개 프라이빗 파티였음에도 바이어 등 약 450여명이 참석했어요.
사실 분크가 올해를 해외 진출의 원년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최근 서울 청담동 플래그십의 매출 절반이 외국인으로부터 나오면서 승산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 거죠. 하지만 또다시 맨땅에 헤딩인 상황. 크게 두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어차피 국내에서도 기존 시장의 문법을 바꾸며 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브랜드의 다짐은 남달랐습니다. “우리만의 전법을 구사하자.”
대체 분크만의 전략이란 게 뭘까요. 잠시 브랜드의 시작으로 돌아갑니다. 분크를 만든 핸드백 디자이너 석정혜 대표는 이미 '핸드백 신화'로 유명한 인물이에요. 그가 만든 '쿠론'이 2010년 코오롱FnC에 인수된 뒤 700억원 매출을 찍는 대성공을 거뒀죠. 이후 신세계인터내셔날을 거쳐 대기업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차기작'으로 분크를 선보입니다. 이번에도 남다른 길을 택하면서요.
일단 백화점 브랜드로 성공한 경험을 답습하지 않았어요. 온라인에만 집중합니다. 론칭 전부터 개인 인스타그램에 사무실 인테리어를 공개하며 브랜드의 시작을 예고하는가 하면, 제품을 꾸준히 그리고 자주 노출시켰어요. 화보 같은 매끈한 사진이 아니라, 석 대표의 일상 모습 속에 등장하는 조연 아닌 조연으로요. 지금도 그의 계정에는 비슷한 포스팅이 꾸준히 올라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대세가 된 온라인 쇼핑의 핵심은 ‘기억’이 아닌 ‘검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지족의 손안에서 자주 보이는 브랜드가 되는 것, 찾아봤을 때 끌리는 콘텐트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죠. 낯선 이름이라도 매력적인 영상이나 사진만으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거죠.
흔한 홍보도 택하지 않았어요. 브랜드 론칭부터 톱스타를 내세워 광고 찍고 퍼뜨리기보다 디자이너 스스로 가방과 어울리는 스타일링을 선보인 거죠. 셀럽을 활용하더라도 전략 상품을 ‘뿌리기’ 보다는 각자에 어울릴 가방을 직접 골라 주는 식이었죠. 그러다 보니 이후에도 #협찬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드는 가방이 됐어요.
브랜드의 심볼이 확실한 것도 검색어로서 톡톡한 역할을 했어요. 석 대표는 ‘오캄(Ockham)의 면도날’이라는 철학 용어를 빌려 면도칼 모양의 잠금장치를 시그너처로 내세웠는데요. 브랜드명 대신 ‘면도칼 가방’이라는 키워드가 생기면서 분크를 단박에 찾아낼 수 있는 상용문자가 생긴 셈이죠. 온라인을 앞세운 전략은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브랜드 성장에 기폭제가 됩니다. 2020년 150억원이던 매출이 2년 사이 410억원으로 뛰어올랐으니까요.
일본에서도 ‘디지털 퍼스트’는 그대로 적용될 예정이에요. 스타일 아이콘이 될 만한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하면서 광고판이 돌아가듯 SNS에서 다양한 콘텐트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해요.
“새로움 원하는 고객 위해” 수요일마다 신제품 드롭
꾸준히 보여준다는 건 결국 보여줄 게 많다는 의미입니다. 분크는 매주 수요일마다 신상품을 출시해요. VWD(Vunque Wednesday Drop)란 이름으로 햇수로 7년, 341회를 이어가고 있어요. 일 년에 두 번, 신제품을 쏟아내는 보통 핸드백 시장 문법과는 또 다른 지점인데요, 분크는 1년 치 편성표를 한 번에 만들어 3~4개월 사이 생산까지 마무리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건 분크라는 브랜드의 본질을 그대로 담은 프로젝트에요. 석 대표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의 본질은 좋은 가방이에요. 시장이 위축됐다면 그건 가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만한 제품이 없어서 벌어진 것이겠죠.”
이 말 속엔 ‘새로움을 충족시키지 못한 시장’에 대한 아쉬움이 깔렸어요. 경기가 안 좋으면 실적이 낮은 브랜드는 재고를 할인해서 팔게 되죠. 그때까지 신제품을 도전적으로 내놓을 수 없고요. 결국 명품이 아니어도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싶은 패션 피플이 지갑을 닫는 악순환이 생겨나죠.
VWD가 공개되는 매주 수요일, 분크의 온오프 채널에는 평일 대비 평균 2.5~5배 이상 많은 고객이 방문한다고 해요.
분크는 이 ‘민첩함’이 해외에서라고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당장 이번 가을부터 한국과 동시에 일본에서도 신제품이 출시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각국에 맞는 단독상품 개발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해요. 가령 아직 버스 티켓을 쓰는 일본에선 티켓 주머니가 있는 핸드백을 따로 만드는 식이죠. 온라인 쇼핑의 관건인 배송 역시 영종도 자유무역지구 내 물류가 갖춰진 업체와 손을 잡고 주문과 동시에 공항에서 발송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합니다.
디자이너 이상, 브랜드의 소통 채널이 되다
석 대표와 분크의 시작을 함께 한 박세윤 본부장은 브랜드에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석정혜’라는 이름을 댔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그는 단순한 창업자·디자이너·크리에이터로서만이 아니라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닿게 하는 하나의 채널이기 때문이에요.
실제 석 대표는 개인 인스타그램·블로그 외 SEOK TV 유튜브 채널과 분크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등을 통해 소비자와 소통합니다.
인스타그램의 경우 주 2~3회 라이브를 하면서 이 가방은 왜 이런 디자인이고, 왜 이 컬러를 썼는지, 어떻게 들면 좋을지 등을 알려 줘요. 론칭 초반엔 댓글 소통으로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기도 했죠. 이때 만난 고객들 상당수가 ‘분님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분크를 응원해 주고 있어요. 브랜드와 소비자가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케팅에서 흔히 말하는 ‘브랜드 팬덤’이 형성된 것이죠.
실제 석 대표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이나 피드 반응이 제품 판매에 영향을 끼치기도 해요. 제품 관련 문의나 호응이 현저히 높은 제품일수록 출시 초반 매출이 높죠. 올해 출시된 제품 중 라이브에 등장한 ‘헤이 더블 포켓 백팩’ 등은 4만 5000개 이상이 팔려 나갔어요.
분크는 론칭 때부터 ‘트렌드는 스타일이 아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어요. 대세를 좇는다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과거 잇백에 대한 과감한 거부입니다. 그러면서 나다움을 강조하는 이들이 분크의 고객이라고 이야기하죠.
지금까지 브랜드의 성장 스토리를 되짚어보니 분크 자체가 이 캐치프레이즈를 그대로 닮아 있어요. 이전의 비즈니스의 관례를 거스르고 자신만의 길을 택했으니까요. 어쩌면 분크는 단순히 핸드백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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