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요금' 안 쓰고 '진짜 제주'를즐기는 법 [수산봉수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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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 대구문화유산지킴회 회원들이 지난 3~5일 제주도 문화재답사를 와서 키아오라리조트에 묵었다. |
ⓒ 이봉수 |
여행리서치 전문기관 <컨슈머인사이트> 조사에 따르면,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 관심도는 제주도가 특히 급락해 7월에는 29%까지 떨어졌다. 강원도는 45%여서 지난해를 기점으로 제주도가 밀리기 시작한 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제주 관광이 이렇게 시든 이유는 자업자득인 측면도 크다. 일부 음식점이 '바가지
요금'을 씌워 관광객의 제주 외면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항공료와 렌터카 요금도 추가로 부담해야 되니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으로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육지 관광지가 대체재로 떠오른 것이다.
극심한 불황 속에 찾아온 빈객들
▲ 키아오라리조트에 묵는 답사관광단의 환영만찬을 위해 삼겹살 솥뚜껑구이와 숯불구이를 준비하고 있다. |
ⓒ 이봉수 |
싸면서도 맛있는 토박이 음식점 찾아다니기
음식점은 한 끼 7000원에서 1만 원 안팎으로, 싸면서도 맛있는 제주 토박이들의 맛집을 골랐다. 사실 제주의 맛집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잘 활용하는 음식점들이 과점하는 경향이 있다. 한때 제주 이주 바람을 타고 육지에서 온 젊은이 중에는 음식점을 개업하면서 사회관계망을 이용해 맛집으로 소문냈지만 실제 맛은 음식값에 못 미치는 곳도 많다. 대개 토박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들은 맛도 있고 가격도 싼 데가 곳곳에 있는데 외지인이 알기는 쉽지 않다.
▲ 여행단에 미리 보내준 노선도와 주요행선지. 첫날 서쪽 항파두리항몽유적지와 추사유배지①, 남쪽 쇠소깍②, 둘째 날 동쪽 키아오라리조트③와 대수산봉, 섭지코지, 셋째 날 동북쪽 토끼섬④, 중산간지대 비자림과 4.3평화기념관⑤. 그리고 공항 근처 제주목관아와 용연. |
ⓒ 네이버지도, 이봉수 |
답사관광단이 제주공항에 도착한 뒤 점심을 먹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서북쪽 애월읍 항파두리항몽유적지. 1271년 삼별초군이 원나라 침략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호국의 성지로 국사 시간에 배운 곳이다. 그러나 당시 탐라 백성에게는 상당한 감정 기복이 있었던 듯하다. <제주설화집성>에 실린 아기업개 전설을 예로 들면, 제주에서 삼별초군을 이끌던 김통정 장군은 '현지처'나 다름없는 아기업개의 배신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아기업개는 아기를 업어 키우는 업저지의 제주어인데요. 김통정의 아이까지 밴 이 여인은 왜 장군을 배신했을까요? 신화 해석하는 분들은 구전되는 전설이나 신화 속에 당시의 민심이 반영돼 있다고 보죠. 제주의 민심은 어느 편이었을까요? 삼별초? 아니면 여몽연합군?"
행선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뇌피셜'임을 전제로 내 나름의 해석을 이어간다. 탐라국이 독립성과 고유문화를 이어오다가 고려 숙종 때인 1105년 제주군으로 편입되자 탐라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려에서 '제주'(濟州)는 말 그대로 '물
건너 고을'이나 유배지일 뿐이었고, 수탈도 심해졌다.
▲ 삼별초군의 최후 저항 거점이던 항파두리 토성 안에는 건물 주춧돌과 축대 등이 남아있다 |
ⓒ 이종원 |
제주도는 헌법에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표현돼 있고, 학교에서는 제주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육지 교과서를 그대로 배워야 했다. 탐라사는 가르치지도 않았고, 음악 시간에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나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되는 '설날' 같은 동요를 배웠는데, 제주 아이들에게 무슨 감동을 줬을까? 제주에는 기차는 물론 까치도 없었다. <일간스포츠>가 1989년 까치 보내기 운동을 벌여서 들여온 46마리가 엄청나게 번식하면서 생태계 교란과 정전 사고를 일으키는 골칫덩어리가 됐다.
제주 백성에게 고려와 원나라는 모두 외세였으니 수탈을 덜 하는 쪽에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에 편입된 뒤 제주로 파견된 목민관은 감시의 눈도 없으니 가렴주구를 일삼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고 어느 곳보다 잦은 민란의 요인이 됐다. 제주민은 삼별초가 들어온 뒤 육지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삼별초의 축성 작업 등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벌할 움직임을 보인데 다가, 항파두리성 말고도 제주도 해안 전체를 둘러싸는 환해장성 구축에 가혹하게 동원되고 먹을 것도 부족해지자 갈등이 생겼다. 전세가 불리해 보이자 토벌군 쪽에 붙는 이도 있었을 터이다. 아기업개의 변절은 개인 사정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세한도에 그려진 것은 무슨 나무일까?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정읍의 추사 김정희 유배지. 당시 대정현은 특히 중죄인들이 많이 유배된 곳이다. 추사는 절도안치에 위리안치가 가중될만큼 중형을 받았으나 여기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다.
▲ 추사가 유배 시절 그린 세한도(국보 180호). 추사는 노송 한 그루와 제주에 흔한 곰솔 세 그루를 그렸으나 곰솔을 잣나무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
ⓒ 국립중앙박물관 |
"1844년에 그린 세한도에는 오른쪽에 노송이 있지만, 왼쪽 세 그루는 측백이나 잣나무가 아니라 곰솔 같습니다. 의문점이 있으면 파고드는 성격 때문에 대정읍 근처를 돌아다녀 봤는데 측백이나 잣나무는 눈에 띄지 않고 곰솔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어요. 불과 180년 만에 제주의 생태계가 획 바뀔 수는 없으니, 세한도의 잣나무도 곰솔로 추정합니다. 곰솔은 줄기가 검다고 흑송, 바닷가에 많이 자란다고 해송(海松)이라고도 부릅니다"
'추운 겨울이 돼서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는 문구도 실은 <논어>에 나오는 것이고, <장자>에도 비슷한 문장(天寒旣至 霜雪旣降 吾是以知松柏之茂也)이 있다. 선비들의 필독서에 '송백'이라 돼 있으니 육지 선비들이 곰솔을 잣나무로 지레짐작하지 않았을까?
추사의 위대함과 한계
추사는 사실 중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다. 세한도의 둥근 창도 조선에는 없는 청나라 창이다. 추사는 북경에서 완원(阮元)의 제자가 되어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은 뒤에는 줄곧 그 호를 사용했다. 청나라 친구들에게 그의 속마음도 털어놓았다.
"나는 중국을 심히 사모한다. 조선엔 사귈 친구가 없다"
"내 낳은 곳은 미개한 땅,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럼이 있다."
그런 추사였으니 하물며 변방 중에 변방인 제주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 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추사의 제자 허련이 만든 <완당탁묵>에는 현전하지 않는 추사의 수선화 그림이 판각돼 있다. |
ⓒ 추사박물관 |
▲ 관광을 다니면서도 집 반찬 준비를 염두에 두는 여성 회원들이 성산포 수협 공판장 인근 가게에서 상처가 조금 난 갈치를 헐값에 사서 택배로 부쳤다. |
ⓒ 이봉수 |
▲ 학생들이 하교한 뒤 방문한 수산초등학교. 학교 담이 된 성벽은 사진에 찍히지 않았지만 잘 보존된 고목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 권보윤 |
"제주도 큰 마을마다 있는 당나무에는 흰 종이로 된 소지가 걸려있거나 이곳처럼 담벼락 틈에 끼워져 있습니다. 소지에는 원래 소원을 쓰게 돼 있지만 제주의 신들은 글 모르는 할머니들을 위해 '백지 소원수리'도 하는 거죠. 소지를 가슴에 대고 소원을
빌면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거예요. 제주의 토속 신앙이 민중 속으로 파고든 겁니다."
▲ 수산초등학교 뒤 진안할망당에 꽂혀 있는 백지 소지들. |
ⓒ 이봉수 |
셋째 날에는 아름다운 고성-세화 간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토끼섬이 보이는 하도리에서 버스를 잠시 세웠다. 토끼섬은 해변에서 50m쯤 떨어진 아주 조그만 섬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문주란 자생지이다. 천연기념물 제19호로 지정돼 출입이 금지된다. 정상에 토끼를 닮은 바위가 있다 해서 또는 문주란 꽃이 하얗게 피면 토끼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저녁 어스름에 활짝 피기 시작한 토끼섬의 문주란(왼쪽)과 문주란 열매(오른쪽). |
ⓒ 국가유산채널, 이종원 |
늙어서 서비스업을 해봐야 하는 이유
▲ 4.3평화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는 대구문화유산지킴회 회원들. |
ⓒ 이봉수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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