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사회로 이끌려면 ‘의사소통’부터 원활하도록 지원을”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려면 외부와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는 일, 공청회에 참여해 질문하거나 자기주장을 펼치는 일,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는 일. 모두 ‘의사소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장애인의 사회생활이 유독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본은 ‘구어(입말)’이다. 그러나 일부 장애인은 구어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 뇌 손상으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 원활한 음성 발화가 어려운 뇌 병변 장애인, 발달 수준이 일반적 수준보다 떨어지는 지적 장애인이 한 예다.
장애인이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의사소통’부터 지원해야 한다. 말로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려운 사람은 상징 판이나 몸짓으로 의도를 표현하게 하고, 지적 능력은 일반적 수준이나 단순히 발음이 어려운 상태라면 상징 판을 눌렀을 때 구어 음성이 합성돼 나오는 기기를 쓸 수 있게 하는 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 본인에게 특화된 의사소통법을 전문 인력이 교육하고, 세상엔 다양한 방식의 의사소통이 있음을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가서 의사소통할 대상의 절반은 비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상징 판이나 음성 합성 기기 등을 장애인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해 물적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 장애인 의사소통에 대한 지원이 일부 장애 유형에 치우쳤다는 것이다. 장애인 지원의 법적 근거인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주로 시각·청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 보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어 통역, 점자, 음성 안내 등의 의사소통 방식을 지원해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도 건물 층수, 지하철 도착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법은 주로 지적 장애, 그중에서도 자폐성 장애의 의사소통을 돕는 게 골자다. 코로나19 안전 수칙 같은 자료를 이들도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개발해 보급하는 식이다. 중부대 특수교육학과 김기룡 교수는 “의사소통 권리는 일부 유형 장애인의 정보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적 권리로만 언급되고 있다”며 “그러나 의사소통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고,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인적 물적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역시 이보다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각 장애, 시각 장애, 뇌성 마비, 근육병 등 신체장애 ▲자폐, 뇌 손상 등으로 인한 인지 발달 장애 ▲실어증, 말더듬증 등 언어 장애 ▲우울증, 불안 장애 등 심리 정서 장애 ▲치매, 파킨슨병 등 노화 신경 퇴행성 질환 등을 아우르면 정부에 등록된 장애인 적어도 10% 이상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애인 권리를 위해 지원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된 ‘의사소통법’의 가짓수도 그리 많지 않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조인영 변호사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위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를 두고 있으므로 장애인 개인의 장애유형에 맞는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며 “그러나 현행법에는 화면 낭독·확대 프로그램, 무지 점자 단말기, 확대 독서기, 인쇄물 음성 변환 출력기 등 일부 수단만 명시돼있고, 이들 위주로만 지원이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필요한 의사소통 방법은 법이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다. 장애 유형에 따라, 그리고 장애인 개인에 따라 적합한 의사소통 전략이 천차만별이다.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의사소통 김경양 위원장은 “상징 판을 직접 선택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은 그의 근육 긴장도나 그 특유의 발성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번역해 전달할 수 있는 대리인이 의사소통 방식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은 의사소통을 폭넓게 정의한다. 말뿐 아니라 언어 텍스트의 표시, 점자, 촉각, 대형 인쇄, 서면, 음성, 쉬운 언어, 장애인도 접근 가능한 멀티미디어, 보완대체의사소통(AAC) 등이 포함된다.
이중 핵심은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이다. AAC는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표현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모든 수단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전자기기 화면에 나오는 상징 아이콘을 눌러 어휘나 문장을 만들면, 음성 합성 기능을 통해 이 문장을 구어처럼 발화하는 기기가 대표적이다.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면 무엇이든 AAC에 포함되므로 보조기기 말고 얼굴,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도 AAC의 일종이다. 장애인의 의중을 읽고 대신 의사 표현을 할 사람도 속한다. AAC 수요는 특히 뇌 병변 장애인에서 높다. 뇌 병변 장애인은 뇌성마비, 뇌 손상, 뇌졸중 등의 이유로 뇌가 손상돼 신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 자연스러운 말하기가 어려울 수 있고,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적 장애가 동반되는 경우가 있어 의사소통 어려움이 가중되는 측면도 있다. 2020년 장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뇌 병변 장애인의 10.7%가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16.8%가 의사소통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기기가 있어도 비용 부담에 사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뇌 병변 장애인의 경우 AAC 기기 사용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반면, 사용하고자 하는 의향은 52%에 달했다. 있는 AAC 도구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례도 있다. AAC 도구 중엔 휴대전화에 내려받아 쓰는 어플리케이션 형태가 있다. 안드로이드나 애플 IOS 등 휴대전화 운영체계가 업데이트되면 도구가 먹통이 되는 일이 잦으나, 운영 개발비가 부족해 제대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평소 이 도구를 쓰던 장애인들은 의사소통 방법을 잃게 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AC 이용 권리 보장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 조인영 변호사는 “장애인에게 행정적 지원이 이루어질 때는 조문에 명시된 수단에 국한돼 지원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장애인의 의사소통 권리를 진정으로 보장하려면 장애인 차별 금지법 등 장애 관련 법령에 AAC도 명시하는 쪽으로 개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강정배 사무총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소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발달 장애가 있는 뇌 병변 장애인을 위해 고성능 AAC 도구를 보급하고, 장애인들이 이를 원활히 이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이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 의사소통 지원 센터 설립 의무도 법에 명시해야 한다. 현재는 장애인의 의사소통 권리를 그 자체로 다루는 법이 없다. 차별 금지나 장애인복지법의 한 하위 항목으로 정보 접근성 향상 측면의 의사소통 권리가 언급될 뿐이다. 이에 지자체들이 별도로 ‘장애인 의사소통 권리 증진에 대한 조례’를 제정해 의사소통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지역도 있다. 예컨대, 서울시는 의사소통 권리 증진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나 부산시는 조례만 있고, 실제 센터는 설치되지 않았다. 부산광역시 조례에 ‘장애인 의사소통권리증진 센터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고 언급할 뿐 설치 자체를 의무화하지는 않은 탓이다. 조인영 변호사는 “지자체가 의사소통 지원 센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장애인의 의사소통의 권리에 관한 법률안은 21대 국회에서 연거푸 제안됐으나 모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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