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30번 '이혼 주례' 한다는 판사가 있습니다

김종성 2024. 10. 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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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30쌍 커플 헤어질 때마다 '선언'... "이혼가방 안 싸본 사람 있나요"

[김종성 기자]

"양 당사자 사이에 이혼하기로 의사가 합치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혼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법원'을 거쳐야 한다. 협의 이혼이나 이혼 조정을 거쳐 가정법원 담당 판사가 위와 같은 선언을 하거나 이혼 소송을 통해 시비시비를 가려서 판결을 내려야 끝이 난다.

성격 차이로 깔끔하게 갈라서는 경우도 있지만, 양육권, 재산 분할, 위자료 문제가 결부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만약 상대방의 귀책 사유를 주장하기라도 하면 지리멸렬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
ⓒ 푸른향기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지난달 24일 발간한 '2024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재판상 이혼 사건 1심 접수 건수는 2만7501건이었다.

혼인 감소의 영향으로 전년(2만9861건) 대비 7.9% 줄어들었지만, "평균 130건 정도를 하루에 처리"해야 하는 가정법원 판사의 입장에서는 저 숫자가 아득하기만 하다. 날마다 저 많은 이혼을 '선언'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결혼 행진이 모든 이들의 축복과 환호 속에 걷는 꽃길이라면, 이혼을 위한 행진은 매순간 상처 입는 지리한 전투입니다. 그러나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을 가까스로 지나 이혼을 위한 행진을 마치고 너덜너덜하게 찢겨진 상처투성이로 그 끝에 도달할지라도, 그 긴 터널을 마치고 나온 순간부터 그 상처는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p. 39)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는 가정법원 부장판사인 저자(정현숙)의 '이혼주례'를 담은 책이다. 그런데 결혼주례는 많이 들어봤어도 '이혼주례'라는 말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알고보니 "협의이혼 및 이혼조정사건에서 판사는 남편과 아내의 이혼의사를 확인한 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종국적으로 이혼을 선언"하는 것을 가정법원 판사 사이에서 그리 부른다고 한다.

앞서 인용한 통계처럼 요즘에는 이혼이 워낙 흔해져서 관련 정보가 검증되지 않은 채 홍수처럼 쏟아진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은 자신이 수임했던 별나고 추잡한 온갖 사례들을 대중에게 전리품인양 공개한다. 이처럼 자극적인 이야기가 '이혼'과 '이혼 당사자'들을 호도한다. 결국 이혼도 사람 사이의 일이고, 그 안에 수많은 어려움과 눈물, 고민과 노력이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혼 당사자 말고, 의뢰자의 입장을 철저히 대변해야 하는 변호사가 아닌 사건의 중심에 서서 양측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고루 청취하는 판사의 생각이 궁금했다. 가사전문법관은 이혼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재판을 진행할 때 어떤 곤란을 겪는지 알고 싶었다. 차가운 판결문의 행간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 말이다.
▲ 이혼(자료사진) 
ⓒ jccards on Unsplash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살고 싶어 이혼하고 싶다는 아내, 남편의 지독한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 이혼법정에 온 아내, 이혼재판 중에 자살을 한 남편, 첫사랑 여자와 주고받은 휴대폰 메시지가 들통나 이혼당한 남편, 불륜남과 만나는 아내를 포기할 수 없는 남편" 등 가사전문법관이 이혼법정에서 만난 풍경은 예측 불허다.

그 중 저자가 최악으로 여기는 케이스는 "어린아이 손을 잡고 이혼법정에 온 부부, 어린 자녀를 이용해 아내를 나쁜 엄마로 몰고 가는 남편"처럼 어른들의 일에 자녀를 개입시키는 부모이다. 또, 미성년인 다자녀를 분리양육하기로 합의해 온 경우에는 "협의이혼의사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가 이혼한다고 아이들까지 이혼시켜서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상처투성이인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법정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이런 태도는 그가 20년차 판사이자 20년차 아내이면서 세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가사전문법관으로서 엄청난 강점이라서 재판 당사자의 입장에 충실히 다가가고, 갈등 상황을 적절히 조정해낸다. 또, 상처투성이인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과정들이 진정성 있게 다가와 감동적이기도 하다.

"왕년에 이혼가방 한번 안 싸본 사람 있습니까?"

저자는 책의 말미에 자신의 경험담을 꺼내 놓으며 자신도 "왕년에 이혼가방 싸본 여자"라고 고백한다. 결혼 생활과 육아를 겪으며 휘청였던 부부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과정을 공유한다. 물론 저자에게 엄청난 해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가사전문법관인 저자에게도 결혼과 육아, 가정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지 않을까.

판결문은 차갑다. 시리도록 차갑다. 감정이 배제된 언어들에 마음이 스며들 틈이 없다. 저자는 판사로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위로를 건넸던 시간들을 기록했다. 판결문에는 차마 쓸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다. 서로의 바닥을 보이며 물어뜯으며 싸워야 하는 소송이 아니라 원만한 조정을 통해 깨어진 가정을 위로하고 싶었던 판사의 따뜻함이 책에 가득하다.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는 가사전문법관으로서 쓴 글이기에 기존의 이혼 관련 서적에 비해 훨씬 전문적이다. 이혼 전반에 걸친 내용 및 과정, 법적 절차에 대해 많은 공부가 된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나의 가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현재 이혼으로 고민하고 있는 부부, 언젠가 부부가 될 청춘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너의 길을 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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