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끌어내린 결정적 사건... 역사 교과서에선 지워질 판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1960년 4월 12일 거리 행진 중인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 시위대. 출처-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 사진집> |
ⓒ 315의거기념사업회 |
보도에 따르면, 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유족회, 3·15의거부상자회, 3·15의거공로자회는 이달 4일 공동성명에서 "우리 현대사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인 3·15의거는 2010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는데도 역사 교과서에서 지워져 후대에 역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7일에는 3·15의거학생동지회가 비슷한 성명을 냈다.
16일에는 경남교육청이 보도자료를 통해 "2025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할 중·고등학교 역사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 3·15의거와 관련된 내용이 누락·축소"됐다고 한 뒤 "중학교 7종 교과서 모두 '3·15의거' 역사용어 자체를 빠트렸다", "고등학교 9종 한국사 교과서 중에는 3종의 교과서에만 <학습활동>·<연표>·<사진>에 각각 '3·15마산의거'. '마산의거', '3·15의거기념탐'이라는 표현을 부분적으로 게재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교과서들의 문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중·고교 16종 역사 및 한국사 교과서 모두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 기술에 편중된 나머지 3·15의거는 빠뜨린 채 '3·15부정선거→4·19혁명'으로 기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3·15 부정선거→3·15의거→4·19혁명'의 역사적 흐름으로 기술하는 것이 타당하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이승만을 하야시킨 1960년의 국민항쟁은 흔히 4·19혁명이나 4월혁명으로 통칭된다. 이 같은 방식으로는 '1960년의 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3·15의거를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위 보도자료의 취지다. 3·15부정선거에 맞서 곧바로 4·19혁명이 일어난 게 아니라, 3·15부정선거에 맞서 3·15의거가 일어나고 이것이 4·19로 발전했다는 문제제기다.
▲ 창원 마산중앙부두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 동상'의 설명판. |
ⓒ 윤성효 |
하지만 이런 통념에 문제점이 많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통념은 1960년 봄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4월, 대학생, 서울'로 좁히는 측면이 있다. 항쟁이 4월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벌어졌고, 대학생뿐 아니라 10대 학생과 일반 시민들도 대거 참여했으며,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부지불식간에 '4월, 대학생, 서울'에 빠지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유명철 경북대 사범대 교수는 2018년에 <사회과 교육> 제57권 제1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현재, 4월 혁명은 '4월 19일', '서울', '대학생'의 의미가 과대 대표되고 있다"고 한 뒤 "4·19라는 명칭은 1960년 봄에 전개된 혁명운동의 연속적인 흐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을 찍은 투표용지를 투표함 속에 두둑이 채워놓고 3월 15일을 맞이했다. 국민이 두렵지도 않고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2014년에 발행된 장덕환 당시 4·19혁명정신선양회 공동대표의 저서 <한국의 4월혁명>은 선거 당일에 마산 유권자들이 목격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투표가 시작되는 시각인 오전 7시, 사전투표 작태를 이미 간파하고 있던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이 투표소 입구를 막고 서서 완강히 저지하는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뛰어들어가 '4할 사전투표'가 이미 실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전투표가 광범위하게 자행됐으므로 투표 통지표를 못 받은 국민들도 많았다. 이런 유권자들의 항의 시위가 그날 아침 마산에서 일어났다. "투표 용지를 받지 못한 또 다른 유권자 수백 명이 당사 앞 도로에 몰려와 '내 표를 찾아달라!'면서 아우성을 쳤다"라고 위 책은 기술한다. 민주당 당사 앞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에 힘입어 오전 10시 30분에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오후 1시 30분에 경남도당이 선거무효를 선언하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게 됐다.
이날 마산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폭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최루탄뿐 아니라 발포까지 하면서 시위대에 맞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략 1만 명 정도가 시위에 가담했다. 이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동시에, 이승만 정권이 군대 동원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을 낳았다.
AP통신 보도를 소개한 3월 16일 자 <동아일보> 'AP의 마산사건 보도'는 "합동통신은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서 250리(250킬로미터의 오기인 듯) 떨어진 마산에서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마산의 투표 본부로 밀려갔다고 말하였다"라며 "정부는 수가 부족한 경찰을 돕기 위해 대규모적인 육군의 증원을 명령할는지도 모른다고 추측이 떠돌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이승만 정권이 경찰력이나 웬만한 군대로는 진압하기 힘든 민중봉기가 일어났기에 그런 추측까지 나돌게 됐다.
9명이 희생되고 80여 명이 다친 이날 시위는 밤 11시 반경에 진압됐다. 이날 시위가 전국 각지의 국민들을 자극해 '1960년의 봄'을 일으켰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이 이승만 정권을 얼마나 당황시켰는지는 군대 동원 풍문이 나돈 것 외에 레드 콤플렉스가 표출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3월 16일 자 <조선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최인규 내무부장관은 이날 오전 0시 30분 담화에서 "마산은 밀수선 등을 이용하여 공산당이 침입·도량(跳梁)한다는 정보도 있어 애국동포들은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마산은 밀수가 많은 지역이라 공산당이 침입해 마구 날뛴다는 정보도 있다면서 3·15의거를 공산주의나 북한과 연계시키려 했던 것이다.
3·15 시위는 전국적인 연쇄 시위를 추동했고, 1개월 뒤의 4·11 마산 시위도 4월 19일의 절정에 달한 전국 대규모 시위, 4월 26일의 이승만 하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결정적이고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 전체적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에너지가 계속 발산되도록 만들었다.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4·19와 함께 김주열과 마산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역사적 맥락이 정확히 전달되려면 역사교과서에서 3·15의거가 제대로 기술돼야 한다는 게 최근 경남에서 계속 나오는 목소리다.
▲ 창원마산 3.15의거기념탑. |
ⓒ 윤성효 |
논문은 "2·28민주운동은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순수한 정의감을 가지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부패한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에 저항한 학생운동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민주화운동을 선도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라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에서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확산되어 그 분위기는 4월 19일 혁명일까지 이어졌다. 3월 1일에는 서울·대구에서,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3월 7일에는 부산에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3월 10일에는 대전·수원·대구·충주·부산에서, 3월 11일에는 부산에서, 3월 12일에는 부산에서, 3월 13일에는 서울·오산에서, 3월 14일에는 서울·부산·포항·원주·인천에서, 3월 15일에는 마산·광주·진주·부산·포항에서 ······ 마침내 혁명일인 4월 19일에는 서울·부산·광주·대구·인천·청주에서 계속해서 시위가 이어졌다."
1960년의 봄은 2·28 대구 시위, 3·15 마산 시위(제1차 마산의거), 4·11 마산 시위(제2차 마산의거), 4·19 혁명처럼 전국적 혹은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킨 대형 사건들이 폭발하는 속에서 전국 곳곳에서 열기를 띠다가 마침내 4월 26일의 이승만 하야를 낳았다. 이런 흐름을 교과서에 제대로 담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4월, 대학생, 서울' 중심으로 축소되기 쉬운 우리의 인식을 보다 정교히 해줄 수 있다.
대통령령으로 규정된 현행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기념일규정)은 2월 28일을 2·28민주운동기념일로, 3월 15일을 3·15의거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는 1960년 혁명에 대한 2·28 대구 시위와 3·15 마산 시위의 기여도가 우리 사회에서 이미 공인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공인을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 공금 빌려 조의금 낸 서울중앙지검 수사과장, 더 수상한 정황
- 뒤숭숭한 용산... 엄마들이 윤 대통령 탄핵집회에 나선 이유
- 다주택자 상위 1천 명, 무슨 돈으로 4만 1721채 구입했나
- "김건희 체면 생각할 때 아냐" 법사위, 영부인 동행명령장 발부
- 공식행사 자취 감춘 김 여사... 윤 대통령, 연이어 '나홀로 참석'
- 김건희 여사가 주식 초보?... 2018년 인터뷰 보니
- 한동훈·이재명, 다시 만난다... 여야 대표 회담 공식화
-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 '외로움 없는 서울'에 총 4513억 투입, 오세훈 "고립·은둔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