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서부원 2024. 10. 1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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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자화자찬 홍보, 블랙리스트 실무자들, 스웨덴대사관 쫓아간 보수단체

[서부원 기자]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꿈에 그리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로 우뚝 섰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구리다'. 거칠게 말해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욕되게 할 만큼 문학적 감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한강 작가의 수상 작품마다 품고 있는 문제의식과는 사뭇 동떨어진 행태라 얼굴이 화끈거리는 요즘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광주의 힘입니다!'

최근 광주 시내 간선도로의 대형 광고판에 큼지막하게 띄운 글귀다. 두 분의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역사적인 성취이자 국가적 경사임은 분명하지만, '광주의 힘'이라는 결론이 영 마뜩잖을뿐더러 생뚱맞기까지 하다. 특히 '힘'이라는 글자에는 지역주의에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손바닥만 한 지역 안에 가두는 꼴
 광주광역시가 온라인과 광주 시내 간선도로의 대형 광고판에 띄운 글귀
ⓒ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는 김대중과 한강을 배출한 지역으로서 자부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테다. 그러나 몽니 부리듯 따지려 들면 정확하지도 않다. 김대중은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한강은 광주에서 태어났을 뿐 9살에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다.

굳이 연관 짓자면, 광주는 김대중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함께한 지역적 기반이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의 모티프를 제공했다는 것뿐이다. 김대중과 한강이라는 '인물'에 연연할 게 아니라, 정치와 작품의 기반이 된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곧, '광주의 힘'으로 눙칠 게 아니라, '광주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라고 써넣었어야 옳다.

지역 이름인 광주를 앞세우다 보니,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위대한 정치인 김대중과 작가 한강을 손바닥만 한 지역 안에 가두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설령 선의일지라도 '대구는 졌다'거나 '대구 시민들은 반성해야 한다'는 식의 인터넷 댓글이 썩 달갑지 않은 건 그래서다. 내가 아는 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대구 시민도 함께 기뻐하고 있다.

광주를 뽐낼수록 덩달아 '반작용'이 드세지는 모양새다. 유튜브에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되레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콘텐츠가 더욱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주목받고 싶지 않고, 조용히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작가의 수상 소감을 '5·18의 거짓말이 드러날까 봐 몸을 사리는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참고로, 현재 교과서 속 5·18의 공식 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진보적인 매체를 자임하는 언론에서조차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학계에서 광주라는 지역명을 뺀 건, 유신 이후 이른바 '긴조(긴급조치) 시대'에 봇물 터지듯 일어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을 광주가 독점하고 타자화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인식에서다.

중앙 정부든 지방 정부든 진정 두 분의 노벨상 수상을 경축한다면, 버젓이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이들을 찾아 단죄하려는 모습부터 보여야 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에 정부는 답할 의무가 있다. 하물며 이미 역사적 평가와 사법적 판단까지 끝난 사안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핑계 삼아 뒤로 숨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당장 헌법 전문에 '5·18정신', 이 다섯 글자를 수록하는 게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 시절부터 온 국민 앞에 약속해 온 바다. 헌법 정신을 대표하는 전문에 등재된 이상, 누구도 대놓고 5·18을 왜곡하거나 폄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갑작스러운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국정감사장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함께 손뼉을 치며 기쁨을 나누는 광경이 연출됐다. 그들이 수상작인 <소년이 온다>가 5·18 당시의 국가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사사건건 언성을 높이며 대립하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축하한 만큼 5·18 헌법 전문 수록은 시간문제로 봐도 될 성싶다.

작가를 향한 인신공격
 지난 14일 보수 단체 회원들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유튜브
한편, 박근혜 정부 시절 한강 작가를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한 실무자와 최근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유해 도서'로 낙인찍은 경기도교육청 관계자의 태도 또한 '구린'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공직 사회 전체를 욕 먹이고 있다. 오로지 면피를 위한 그들의 '바보 행세'에 온 국민이 혀를 끌끌 찼다.

당시 당국의 조치에 부화뇌동한 이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작품의 내용을 왜곡하고 그릇된 편견을 덧씌우는 작태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알린 소설 <채식주의자>가 대표적이다.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문학계가 손꼽은 최고의 작품인데도 정작 우리나라에선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 '문제작'으로만 남았다.

특히 아이들에겐 지금껏 '금서'로 취급됐다. <채식주의자>를 읽어봤다는 아이는 거의 없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이구동성 읽어서는 안 될 책이라며 한마디씩 보탠다. 외설적 내용의 불륜 옹호 소설이라거나 페미니스트들이 광분하는 작품이라는 식의 악평을 늘어놓고 있다. 급기야 작가를 향해 '꼴페미'라는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최근 며칠 사이 그렇듯 모진 편견을 무릅쓰고 <채식주의자>를 찾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은' 작품이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거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편견이 단숨에 걷히진 않겠지만, 만약 노벨문학상이 아니었다면 아이들에겐 여전히 '금서'로 남아 도서관 서가의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해 전 한강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이 우선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이는 국가와 사회 구조의 폭력에 천착해 온 작가가,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에두른 거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실 앞에 자신의 작품들이 기억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를 소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일거에 '사면 복권'되었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깊이 팬 생채기가 완치되는 데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듯싶다. 이 와중에 한강 작가의 사생활을 들추려는 유튜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노벨상의 권위를 문제 삼기 뭣하니, 작품 대신 작가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유튜브에선 오래전 작가의 이혼 사실을 특종인 양 떠벌리고 주변 가족들의 신상을 까발리는 기사가 바통 넘기듯 이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은 '조회 수 장사'에 매몰된 그들의 행태를 제어하지는 못할망정 열심히 퍼 나르는 한편, 추가 취재를 통해 어엿한 기사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느닷없이 작가와 가족들이 조리돌림당하는 형국이다.

한술 더 떠 일부 보수단체는 주한 스웨덴 대사관에 몰려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취소해달라는 시위까지 벌이고 있다. 한강 작가가 역사를 왜곡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에서다. 국회가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직접 국가 폭력에 대해 사과까지 한 5·18과 제주 4·3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만행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그들의 작태를 먼 산 불구경하듯 나 몰라라 하는 현 정부와 일부 언론은 노벨문학상을 감히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요즘 그의 작품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서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네며 다독이는 것만 같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
- 미셸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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