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드는 '고교학점제' 폐지론, 왜 실험은 직업계고부터였나

오성훈 2025. 9. 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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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학생 맞춤형 교육'이라더니... 실패의 대가, 왜 늘 직업계 고등학생들 몫인가

[오성훈 기자]

 8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촉구 양육자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5.8.27
ⓒ 연합뉴스
2025년 여름, 2학기 개학을 앞두고 신문 지면에는 고교학점제 '폐지론'이 오르내렸다. 개학 이후에는 교원단체의 폐지 주장과 교육부의 보완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학점제는 '학생 맞춤형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희망처럼 포장됐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딪히자 제도는 흔들리고 있다.

고교학점제의 이상과 현실

교육부는 학점제를 도입하며 "학생의 적성과 진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학교"를 약속했다. 대학처럼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졸업하는 그림. 말만 들으면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상을 그리려면 먼저 캔버스가 필요하다. 물감과 붓도 갖춰져야 한다. 준비 없는 이상은 공허하다.

나는 33년간 직업계고에서 근무해 온 현직 교장이다. 이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고교학점제 실험의 첫 무대가 직업계고였다는 점이 몹시 씁쓸하다. 학점제는 2018년 연구·선도학교를 시작으로, 2020년 마이스터고 전면 도입, 2022년 특성화고 확대를 거쳐 2025년 일반계고로 확대됐다. 일반계고보다 3년이나 먼저 학점제를 시행한 곳이 직업계고였다. 정책 설계자의 시선은 언제나 일반계고를 향하면서, 시행착오는 늘 직업계고 학생들이 감당해야 했다.

성과와 그림자

제도 도입 이후 긍정적 변화도 있었다.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늘었고, 일부 학교는 대학이나 지역 사회와 연계한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학교 역시 올해 폴리텍대 성남캠퍼스, 가천대, KT와 함께 '학교 밖 교육과정'을 열었다. 로봇에 특화된 학교에서 채우기 어려운 '반도체 설계·제조', '인공지능 심화' 과목을 외부 자원으로 보완한 것이다. 학교 밖 교육과정에 참여한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다. 제도가 지향한 '학생 중심 교육'이 단순한 구호만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가장 큰 문제는 직업계고의 정체성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교육통계서비스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직업계고 취업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상승했다. 2020년 42.5%였던 대학 진학률은 2024년 48%까지 올랐다. 같은 해 졸업생 취업률은 26.3%에 불과했다. 학점제가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의 발판으로 변질되면서, '선취업·후학습'이라는 직업계고 본래 취지를 오히려 약화시킨 셈이다. 입시 과목 위주로 수업을 선택하면서 전공 실습이 줄고, 결국 취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도 이어졌다.

교사들의 반대도 거셌다.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채 복잡하게 얽힌 시간표, 교사 한 명이 세 과목 이상을 떠안는 상황, 전공과 무관한 대체 수업. 결국 수업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피해를 본다"는 현장의 경고는 수없이 울렸지만, 교육 당국도 언론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왜 직업계고가 먼저였을까
 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열린 '2025 경기교육청 직업계고 취창업박람회'에서 참가 학생들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서 짚어야 할 근본 문제가 있다. 왜 직업계고가 먼저 실험대상이 되었을까. 그건 직업계고가 (고교 입시 생태계에서) 사회적 약자로 자리매김해 왔기 때문이다. 일반계고 학부모와 여론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 반면 직업계고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사회적 관심도 적다. 그래서 새로운 정책은 늘 직업계고부터 시작됐다. 실패해도 큰 정치적 타격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도 설계의 관성이자 구조적 차별이다.

직업계고 교사들은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번번이 묵살됐다. 새 제도에는 막대한 예산이 따라붙는다. 연구자, 단체, 정부 지원에 기대야 하는 학교까지 모두 침묵했다. 이해관계가 교사들의 경고를 공허한 메아리로 만든 것이다.

그러던 것이 2025년, 일반계고에 학점제가 본격 적용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야 사회가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은 다교과 수업, 형식적인 '최소 성취 보장 지도', 과중한 행정 업무를 이유로 들며 일제히 반발했다. 직업계고가 이미 7년 전부터 겪었던 문제였다.

정책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의 대가를 언제나 같은 아이들이 치른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차별이다. 만약 학점제가 폐지된다면, 지난 7년간 직업계고가 흘린 땀과 시간은 모두 헛수고가 된다. 그 과정에서 침묵했던 단체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언론, "내 아이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직업계고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교육 당국과 입법부. 모두 직업계고 차별의 공범이다.

실패가 아닌 차별

방과후, 교장실 창밖으로 드론을 조종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드론, 땀에 젖은 얼굴. 나는 다짐한다. 이 아이들이 더는 제도의 실험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아이들의 미래는 더 따뜻하고, 더 공정해야 한다. 제도를 설계할 때 가장 약한 곳을 먼저 살피는 것,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교육의 출발점이자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학점제 논란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만약 고교학점제가 잉태한 문제점들을 보완하지 못한 채 폐기된다면, 직업계고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자괴감은 클 수밖에 없다. 직업계고 아이들을 실험에 동원한 공범이 된 셈이니까.

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직업계고를 정책의 실험장이 아닌 동등한 교육 주체로 존중해야 한다.
둘째, 학점제의 장점을 살리되, 직업계고 학점제 운영 과정에서 얻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제도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 직업계고 역시 취업이라는 직업계고의 본령이 흔들리지 않도록 운영 방안을 정비해야 한다.
셋째, 향후 교육정책 실패의 비용을 힘없는 학생이 아닌 어른들이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33년 현장에서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은 이것이다. 가장 약한 곳을 먼저 살피는 것이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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