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기구가 더 무서워요” 9배 중력 견디며 전투기 모는 그녀
지난달 26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 건군 76주년 국군의 날을 앞두고 육·해·공군 전투복 차림의 군인들이 거리를 오가는 가운데 조종복을 입은 여군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제52시험비행전대 소속 정다정(38) 소령이었다. 정 소령은 최근 여군 최초로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인 KF-21 ‘보라매’의 개발시험비행조종사로 선발됐다. ‘테스트 파일럿’으로 불리는 시험비행조종사는 연구 개발 중인 항공기에 탑승해 최악의 상황을 스스로 만들며 기체가 과연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등 각종 고난도 임무를 수행하는 최정예 조종사다.
현재 공군 시험비행조종사는 서른 명이 채 안 된다. 5년 전 여군 최초로 시험비행조종사가 된 정 소령은 이번에도 8명에 불과한 KF-21 시험비행조종사에 여군으론 유일하게 뽑혔다. 171㎝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첫인상부터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동시에 전해졌다. 스무살 이후 줄곧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것도 “헬멧을 쓰고 벗기 편해서”라는 그는 이날도 “마땅한 가방이 없어 헬멧 가방에 소지품을 챙겨 나왔다”며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 너머로 빨간 마후라가 가을바람에 나부꼈다.
“헬멧 쓰고 벗기 편해” 짧은 머리 고수
Q : 늘 ‘최초’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A :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뿐이다. 그 일에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으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KF-21 시험비행조종사만 하더라도 (남자) 선배들이 2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단지 내가 첫 여군이란 이유로 화제가 돼 부끄러울 따름이다.
Q : 시험비행은 얼마나 자주 하나.
A : 거의 매일 한다고 보면 된다. 이륙에서 착륙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안팎이지만 비행 전후로 준비·평가하는 시간이 더 길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정 소령은 2005년 공사 57기로 입학했다. 4학년 때는 공사 역사상 여생도로는 두 번째로 전대장 생도를 맡았다. 총학생회장격인 전대장 생도는 사관학교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학업 성적과 생도 생활이 우수할 뿐 아니라 동기생들과 훈육관의 신임을 두루 받아야만 하는 자리다. 2009년 소위 임관 후엔 제20전투비행단에서 공군 주력 기종인 F-16 조종사로 활약했다. 2년간 사관학교 훈육관으로 후배 장교 양성을 돕기도 했다.
F-16 조종사로 활약…총 비행시간 1400시간 달해
그는 “훈육관으로 근무하며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시험비행조종사 선배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며 “한국형 전투기 개발에 기여한다는 사명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비행이 너무 그리웠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9년 여군 최초로 시험비행조종사에 선발된 정 소령의 총 비행시간은 1400시간에 달한다.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초음속 전투기인 KF-21은 현재 6대의 시제기로 시험평가가 진행 중이다. 항공기 양산엔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든다. 본격 생산에 앞서 시제기로 철저한 성능 검사를 거치는 이유다. 시험비행조종사는 개발 단계에 있는 시제기를 몰아야 하는 만큼 조종 능력은 물론 위급 상황에서의 뛰어난 대처 능력이 필수다. KF-21 시험비행 자격도 시험비행조종사 교육 과정을 수료한 뒤 지상학술평가와 실비행평가 등을 모두 통과해야 취득할 수 있다.
정 소령은 “KF-21은 F-16보다 엔진이 하나 더 추가돼 안정성이 높아졌다”며 “물리적인 조작 버튼이 줄어드는 등 훨씬 현대화된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전했다. 지난 8월 양산에 돌입한 KF-21은 2026년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Q : 시험비행 중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나.
A : 누구도 경험하지 않은 기종을 탄다는 점에서 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비행 중엔 두려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직은 불완전한 항공기를 한계 상황으로 만든 뒤 정상 작동을 하는지 테스트하는 게 시험비행조종사의 주된 임무다. 고난도 기동이 필요할 때도 있고 최고도, 저고도, 초음속 비행을 하기도 한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비행 중 일부러 엔진을 껐다 다시 켜거나 갑자기 조종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급기동을 하는 것도 다반사다. 빙결 방지 장치의 정상 작동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해 일반 여객기는 피해 다니는 구름 속을 뚫고 들어가기도 한다.
설렘과 두려움 공존하는 시험비행의 세계
그는 “그러다 보니 임무를 무사히 다 끝내고 돌아올 때가 돼서야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며 “만에 하나라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대비해야 하니 오히려 지상에서 비행을 준비하며 시뮬레이션할 때가 더 긴장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Q : 놀이기구는 시시할 것 같은데.
A : 조종사가 되기 전엔 놀이기구 타는 걸 좋아했는데 이젠 안 좋아한다. 오히려 전투기보다 놀이기구가 더 무섭다(웃음).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를 믿고, 지상에서 모든 상황을 충분히 대비한 뒤 비행에 임하니 내 입장에선 전투기가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조종사가 되려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가속도 내성 강화 훈련(G-Test)이다. 중력 가속도 증가에 따른 의식 상실과 시력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 가속도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훈련이다. 이때 조종사는 자기 몸무게의 6배(6G)에서 최대 9배(9G)에 달하는 하중을 견뎌야 한다. 정 소령은 “고성능·고기능·고가속을 하는 전투기일수록 고중력을 극복해야 한다”며 “9G를 최소 15초 이상 버텨야 전투기 조종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인은 대개 5~6G의 중력을 받으면 의식을 잃는다. 고성능 전투기가 선회할 때면 최대 9G의 하중을 받게 되는데, 이는 기체가 아닌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극한의 한계이기도 하다. 정 소령이 매일 비행한다는 건 곧 인간의 한계를 매일 뛰어넘고 있다는 얘기다.
Q : 여성이라 조종사 임무가 더 고되진 않나.
A : 비행 훈련 자체가 인간이라면 견디기 힘든 훈련이다. 남녀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남성에 비해 몸무게가 덜 나가는 여성이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신체적인 차이로 인한 어려움보다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여군이 소수라서 힘든 점은 있다. 잘하든 못하든 티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왕 티가 나려면 잘하는 걸로 튀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해 왔다. 여군 선배들이 앞서 개척한 길을 잘 이어가야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는다. 실제로 생도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여자라서 안된다거나 못한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는 모두 여군 선배들 덕분이다 싶다.
Q : 원래 꿈이 전투기 조종사였나.
A : 고향이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충북 청주 근처다. 생도들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공사 홍보 활동을 보고 진학을 결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도 시절엔 비행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오기로 버텼다. 그런 과정을 4년간 거치고 나니 신기하게도 조종사가 되고 싶어졌다. 시험비행조종사 준비를 하면서는 낮엔 비행하고 밤엔 연구하고 새벽엔 운동하는 일상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됐다. 비행 외 시간도 다음날 비행을 위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곤 했다. 그렇게 몇 년째 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최근엔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해 ‘사회 경험’도 하고 있다(웃음).
Q : 조종사로서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은.
A : 조종사들 사이에선 비행을 빠르게 익히고 감을 잘 잡는 사람을 ‘감돌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런 ‘감돌이’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꾸준하게 하는 근성은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안 되면 다음엔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수십, 수백 번 거치면서 조금씩 느는 타입이다.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지게 도전하는 게 조종사로서 강점이라면 강점인 듯싶다.
“여군 아직 소수, 잘하는 걸로 튀고파”
Q : 여군 조종사 생활이 쉽진 않을텐데.
A : 일단 조종사의 삶 자체가 빡빡하다. 비행 자체도 힘들지만 비상 대기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다 보니 워라밸을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이나 육아를 하게 되면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도 워킹맘은 힘들지 않나. 육아휴직 후 조종사로 복귀하는 동료들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들 얘기가 육아에 비하면 조종사는 훨씬 쉬운 일이라던데, 경험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된다.
정 소령은 2019년 F-16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위해 미 공군 비행시험학교를 찾았을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당시 성별이나 나이로 인한 차별을 전혀 못 느꼈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군이 활발히 활동 중인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 국군도 머잖아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시험비행조종사 여군 후배도 곧 나오지 않겠나.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저는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제게 맡겨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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