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비 안 내고 도망간 손님이 남긴 말

김지영 2024. 10. 2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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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운전사] 초두효과와 후광효과... 택시 몰면서 좀 더 신뢰하게 된 매우 비과학적인 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지영 기자]

 2017년 9월 6일 광주광역시청에서 열린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전에 1980년대 택시가 전시되어 있다.
ⓒ 연합뉴스
1992년 겨울, 스물일곱 살의 내가 스페어 기사로 차를 처음 배정받고 생애 첫 택시 운전을 했던 그날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낡은 포니투를 몰고 잔뜩 긴장한 채 회사를 빠져나와 전주 팔달로를 다 지날 때까지 텅 빈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신작로 경계인 천변다리를 건너 용머리고개 앞 길가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택시 운전을 시작한 첫날 첫 손님이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일부 오염된 사실도 있겠으나 그날 새벽 어스름한 거리와 차가운 공기 그리고 스산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학생 모습이 아직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 인생에 처음과 관계되는 것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첫날 오전 일을 마치고 돌아와 차키를 건네받은 교대자에게 첫 운행 소감을 말하면서 인상적인 첫 손님 얘기를 했더니 그가 반사적으로 말을 했다.

"첫날부터 재수가 없었네."

첫 손님이 여자라면 장사 망치는 재수 없는 날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구석구석 만연했던 낡은 시대였다. '안경잡이'가 와도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기는 맑고 높은 건물은 적고 시야가 훤해 모두의 시력이 좋았던 시절 외눈박이 취급을 당했던 안경 쓴 사람에 대한 오랜 편견이 채 가시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수십 년 흐른 지금은 누구나 쓰는 안경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자리에 키와 몸이라는 신체적 편견이 대신하고 있다. 키 작은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일단 '루저'가 되고, 타고난 체형은 아랑곳없이 비율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으로 손가락질당한다.

사회 속 집단의 익명성을 향유하는 인간들은 맹렬하고 일관되게 내면에 숨겨진 졸렬한 본성을 쏟아내기 위한 희생양을 요구하고 만들어낸다. 가장 만만한 건 여성과 사회적 약자다.

신체에 대한 일상적인 조롱과 모욕이 난무하고 당대 문화에서 일반화되지 못한 것들은 죄다 백안시하는 세상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진보하는데도 이런 차별과 편견 그리고 이에 대한 폭력적인 언행은 색깔만 달리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인간사회의 그늘진 숙명이다.

당시 시대 문화와 무관하게 나는 첫 손님이 여자라서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낡은 관습의 뿌리가 낡은 사회적 구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대학 때 책에서 배우고 토론을 하면서 받아들였다. 대신 추운 새벽에 가방도 들지 않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혼자 택시를 타야 했던 이유가 쓸데없이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하고 괜히 연민하는 마음으로 목적지에 내려준 기억이 있다.

많은 상호작용 해야 하는 택시
 '법인택시 운수종사자 채용박람회'가 열린 17일 부산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다솜관 일대에서 참가자들이 택시를 둘러보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택시는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는 일이다. 공간은 좁고 밀도는 높다. 좁은 공간과 높은 밀도의 택시 환경은 사람의 아우라를 짧은 순간 몸에 와닿게 만든다. 매달 수백 명의 사람이 한 택시에서 타고 내린다. 좋고 나쁘고 정감 있고 차갑고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개별적 느낌이 있다.

내리는 순간 금방 사라지고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되는 이 느낌과 함께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요금 시비와 진로 변경 혹은 지연 도착이나 출발지 부재 등) 사소하거나 (폭언, 협박, 주취폭력, 강도 등) 큰 일들이 택시 안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택시는 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짧지만 빈도수는 엄청나게 많은 상호작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택시 안 손님에게 받은 느낌이나 벌어지는 일은 크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할 수 있고 덜 좋은 것과 덜 나쁜 것 혹은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는 좋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것과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은 것의 차이만큼 미세하게 구분되기도 한다.

이런 구분은 어디까지나 개별 택시 기사의 인생과 배움과 경험치 등이 적분된 상태에서 감지되는 손님의 아우라를 미분한 결괏값이 자동으로 연산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같은 사람을 두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서로 다른 감정들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인상은 과학이라는 매우 비과학적인 말을 나는 택시를 몰면서 좀 더 신뢰하게 되었다.

적어도 사람을 판단하는데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첫인상에 대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이 첫인상을 판단하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인공지능(AI)은 그 시간을 0.1초에서 3초 정도라고 알려준다. 미국의 뇌 과학자 폴 왈렌의 연구에서는 상대에 대한 호감과 신뢰감을 판단하는 시간이 0.1초도 안 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아주 짧게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초두효과'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의식적으로 판단된 첫인상이 계속해서 그 사람에 대한 인상으로 고착되는 현상을 말한다. 만약 그 인상이 부정적이었다면 이를 바꾸는 데는 200배의 긍정적인 정보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만 봐도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데 얼마나 인색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또한 '후광효과'는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일부 특징적인 정보를 가지고 그 사람의 전체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심리적 특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의 인간성도 뛰어나게 훌륭할 것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경향이다.

종합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을 몇 초 이내의 짧은 순간에 결정하고 그 사람과의 나머지 모든 시간은 그 사람에 대한 다른 측면의 객관적 정보나 사실과 관계없이 이미 결정된 첫인상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람이 이렇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수백만 년 진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맹수와 적을 빠른 순간 감지하고 판단해야지만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정한 사바나가 아직 몸 안에 새겨져 있는지도.

인류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정착 생활을 시작한 때가 겨우 일만 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인간이 초두효과와 후광효과의 주관적 그늘을 벗어나는 진화가 완성되기까지 어쩌면 백만 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객관적 인간을 자처하는 사람을 내가 믿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적어도 백만 년 동안 우린 아무리 해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

아무튼 짧은 시간 짧은 관계로 끝나는 택시 기사와 손님 사이에 발생하는 일들이 충만하고 유서 깊은 종류일 리는 만무하다. 대체로는 즉각적이고 소모적이고 때로는 (주로 밤에는) 일탈적이다. 게다가 기사와 손님은 그날 처음 본 사이다. 앞선 이론에 따르면 손님이 차에 올라 좌석에 앉기 전 둘은 이미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을 판단한 후다.

판단 정보인 외모와 옷차림, 표정과 태도, 음성과 말투 등이 깔때기 안에 순식간에 섞여 들어갔다가 긍정과 부정 중 한 가지 통합 정보로 빠져나온 후다. 잠깐 타고 내리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 기사에 대한 첫인상을 괘념치 않게 취급할 수 있지만 연이어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는 입장이 다르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마음씨 곱고 착한 사람들일 리는 절대 없고 그중 일부는 분명 택시 기사를 곤란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 일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끊이지 않고 발생하면 택시 기사는 그런 사람들을 골라내고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그 처음은 어쨌든 첫인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택시 앱미터기
ⓒ 김지영
한 날 저녁 늦은 시간, 어느 허름한 주택가 골목길에 사람을 내려주고 빈 차로 나오다가 손 흔드는 사람을 태웠다. 함부로 손 흔드는 모양새부터가 좀 수상쩍다 싶었다. 말쑥함과는 거리가 먼 옷차림에 차에 탈 때 얼핏 비친 비릿한 표정과 목적지를 묻는 말에 그냥 알려주는대로 가면 된다는 일방통행식 말투까지 완벽했다.

짧은 순간 완전하게 부정적인 초두효과와 후광효과가 완성되었다. 그가 손을 흔들던 그때부터 내 주관적 판단은 회피였지만 별수 없는 골목길이었다.

그가 지시하는 대로 우로 좌로를 여러 번 반복하다 골목길을 빠져나가 목적지까지 1킬로미터 남짓 짧은 거리였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터기 지불을 누르고 카드나 현금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덜컥 문을 열고 그냥 나가려고 했다.

'손님 요금 주셔야죠?' 돌아온 대답이 황당했다. '돈 없으니까 경찰한테 신고하든지.' 말하는 태도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막 사는 사람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5800원 기본할증요금인데 경찰 부르고 실랑이하고 그러느니 포기하고 영업을 하는 게 기사 입장에서 나은 선택이라는 걸.

5800원짜리 정의 실현과 현실적인 이익을 두고 아주 짧은 시간 갈등을 했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를 몇 초간 째려보는 것으로 정의 실현을 대신하고 후딱 차를 돌려 콜을 부른 손님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지지하고 신뢰하는 사회 통념

사실 초두효과와 후광효과는 모두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굉장히 주관적인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개념화한 것이다. 심지어는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을 만큼 인간은 자기 주관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 사람의 객관적 정보가 무엇이든 이번 경우는 뭔가 심상치 않을 거라는 내 주관적 판단이 적확했다. 그래봤자 딱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 그는 뻔뻔하고 태연한 걸음으로 멀어져갔지만. 택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이와 비슷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도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택시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리 민감한 방어기제를 작동시켜도 문제적 손님을 사전에 걸러낼 수 없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

첫인상의 판단이 극히 주관적이라는 맹점은 있지만 주술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할 이유도 없다. 주관적 판단의 근거는 각자가 그간 살면서 겪어 온 수많은 관계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정리되어진 함수와 통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얼굴 근육은 80여 개가 있고 근육으로 지을 수 있는 표정은 7000~8000가지라고 하는데 사람의 인상은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근육과 표정이 발달하면서 생긴 자연현상이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해서 이건 어디까지나 순전히 나만의 함수와 통계치에 근거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들어 왔던 사회 통념 중 하나를 아직은 지지하고 신뢰한다.

'인상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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