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들이 눈독 들인 신사업... 오죽하면 용산역에 집합했을까
[김종성 기자]
▲ 용산역 전경 |
ⓒ 위키미디어 공용 |
추석 보름 전에 보도된 1989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 15면은 귀성 열차표를 예매하고자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새벽부터 줄을 선 시민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렇게 힘들게 줄을 서봤자 소용이 없었던 이 시절의 세태를 들려준다.
"27일 상오 4시쯤 호남선 무궁화·통일호 표를 예매하고 있던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조직폭력배 2개 파 2백여 명이 서로 앞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집단 편싸움을 벌였다. 이들은 또 이를 항의하던 시민들에게 욕설을 하며 각목과 주먹을 휘두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 뒤 무더기로 표를 구입, 자리를 빠져나갔다."
새치기가 아니면 표 예매가 수월치 않은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고자 폭력배들이 이른 새벽에 용산역으로 출동했던 것이다. 현장에 나가 줄을 서기보다는 폭력배들이 유통시키는 표를 사는 편이 훨씬 나았던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직폭력배들이 수익성을 발견했을 정도로 새치기 문화는 대중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희극배우들은 당대에 만연된 이 문화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했다. 추석 전날인 1985년 9월 28일 방영된 KBS 인기 프로그램 <유머 1번지>의 특집 제목은 '하늘나라 추석 전야'였다.
저승의 혼령들도 추석을 맞아 잠시 고향에 다녀온다는 설정이 이 프로그램에 나온다. '추석맞이 이승행 차표 판매'라는 간판이 붙은 저승 매표소가 있고, 그 앞에 혼령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질서를 지키자"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일부 혼령들은 이승에서 하던 것처럼 새치기를 해서 다른 혼령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장면을 보고 현실을 떠올리며 박장대소할 정도로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새치기가 상당히 큰 문제였다.
▲ 1954년 9월 12일 자 <경향신문> ‘잠망경'은 추석 연휴 고기집에서 일어나는 새치기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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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창에 '새치기'를 입력하면, 20세기 전반의 주요 일간지에도 새치기가 이따금 언급되긴 했지만, 언론보도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은 1945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해방 이후에 유행한 단어였다.
2009년에 <한국언론학보> 제53권 제5호에 실린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의 논문 '해방공간, 유행어로 표출된 정서의 담론'에 따르면, 1949년에 <학풍> 제14호에 실린 김기림의 '새말의 이모저모'는 새치기라는 단어가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준다.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유행을 탔던 것이다.
이 시기는 1945년 8·15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 해외 한국인들이 대거 귀국하는 때였다. 이 같은 대규모 인구유입 속에서 미군정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무질서가 심화되고 있었다. 미군정을 뒤이은 이승만 정권 때도 마찬가지다. 질서가 무너지고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회주의가 팽배하고 이는 사람들 간의 상호불신을 가중시켰다. 이것이 새치기 문화의 토양이 됐다.
위 논문은 새치기라는 단어가 사회지도층보다는 일반 대중에게서 나왔다며, "불신·부정·부조리"의 만연으로 인해 대중이 "이기주의, 사회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를 절감하는 가운데 이 단어가 유행했다고 말한다. 기회주의에 편승해 불공정하게 이익을 챙기는 집단과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중의 저항감이 이 단어를 유행시켰던 것이다.
미군정기의 혼란은 한국의 전체 역사에서 보면 일시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해방 직후에 갑자기 급증한 새치기 현상도 일시적 현상에 그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것은 1940년대를 지나고 1950년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고착됐다. 잠깐 스치고 지나갔을 수도 있는 무질서가 그 뒤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 지속적 영향을 준 것이다. 이를테면, 새치기는 무질서의 질서화였다.
그로 인해 1950년대 한국인들은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새치기 문화를 추석 같은 때도 경험해야 했다. 추석에 쓸 식재료를 구입하는 현장에서도 새치기라는 신종 풍경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추석 다음날 보도된 1954년 9월 12일 자 <경향신문> '잠망경'은 추석 직전의 서울 시장 풍경을 전하면서 "돈암시장 내에 있는 푸주간 앞에는 밤중까지 고기 한 칼을 사고자 열을 지어 섯는데, 새치기 하는 친구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나종엔 치고 꼬집고 욕설을 퍼붓고 수라장화하였었다고"한 뒤 이렇게 전했다.
"새치기 때문에 고기를 못 산 안낙네나 욕을 주어먹고 매를 맞아가며 고기를 사려던 안낙네나 즐거운 명절이 못 되었을 테니, 새치기라는 놈은 이렇게도 못쓸놈! 어느 때 어디서나 속히 없애야 할 일!"
"욕을 주어먹고 매를 맞아가며" 새치기를 한 "안낙네"들이 예전부터 항상 새치기를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해방 이후 몇 년 새에 무질서와 기회주의와 상호불신이 팽배해지는 속에서 그들도 그렇게 변했던 것이다.
새치기 때문에 명절 고기를 못 샀다는 불평은 그나마 호강스러운 불평이었다. 남의 것을 염치없이 가로채는 새치기 문화로 인해 추석 자체를 쇨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이 팍팍해졌다는 불평도 있었다. 소설가 김송(金松)의 기고문으로 생각되는 1956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 4면의 김송 기고문은 "내가 사는 이웃만 하더라도 추석을 명절답게 마지하는 집이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떡이고 고기 작만을 하는 집이 없는 것 같다. 있다면 한두 집. 그것도 부자연한 새치기 돈벌이꾼에 지나지 못한다. 정당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고작해야 보리밥이나 면할 정도다."
남의 순서를 가로채는 일뿐 아니라 남의 이익을 가로채는 일도 새치기로 표현한 이 글은 새치기에 대한 불만감이 어느 정도나 팽배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3년간의 미군정 직후에 출범한 이승만 정부가 12년간 집권하는 동안에 질서를 올바로 바로잡고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면, 새치기 현상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 같은 존재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았기에, 줄서기에서 나타난 새치기 문화가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면서 위와 같은 불평이 나오게 됐던 것이다.
▲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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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대중 간의 불신을 조장해 상호 신뢰의 가치를 떨어트렸다. 국민들을 반공주의자와 빨갱이로 갈라치기했으며, 빨갱이로 고발되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는 상호신뢰가 전제되는 줄서기 문화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4·19혁명 35주년을 기념해 1995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4면에 펼쳐진 지상(紙上) 토론에서 박호성 서강대 교수는 "한마디로 이승만은 민족의 도덕적 황폐화를 조장하고 기회주의와 요령주의를 확산시켰다"는 말로 이승만 집권기를 평했다. 새치기 문화는 기회주의와 요령주의를 실천한 이승만을 닮은 문화였다.
이승만은 1919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고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도리어 독립운동을 방해하다가 탄핵을 당했다. 그러고도 독립운동가를 자처하며 살다가 해방 뒤에 미국과 친일파들의 협력하에 대통령이 된 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친일청산을 방해했다. 그런 뒤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편법과 부정을 감행했다.
그런 이승만을 지도자로 모신 나라에서 확산된 문화가 새치기다. 미군정 때 등장한 이 현상이 수십 년간의 문화로 정착한 것은 그때 마침 이승만과 그를 닮은 그룹이 세상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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