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7년간 떠나지 못한 곳...우린 외국인들에게 뭐라 할까
[윤찬영 기자]
▲ 소설가 한강 (2016.5.24) |
ⓒ 권우성 |
'변방의 문학', '변방의 언어'가 비로소 세계 문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의미 있는 첫발을 뗀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123년 만에 아시아 여성인 한강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두 작품 모두 '변방'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변방 말이다. 그러니까 변방은 저들 유럽인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안에도 변방은 있다.
▲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입고돼 진열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한강 작가가 처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1980년대 초, 한 작가의 아버지가 어렵게 구해 온 학살 피해자들의 사진첩을 어린 그가 우연히 들쳐 봤던 것.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 중
그는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이 일을 두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도 했는데, 그 근원적 질문을 아주 오래 품고 있던 작가는 마흔이 넘어서야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썼다.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학생 '동호'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
어느덧 30년도 더 지나 저 남쪽 끄트머리 어느 변방에 멈춰 있던 시간은 그의 아름다운 글과 이야기로 되살아나 다시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책이 세상에 나온 뒤에도 작가는 오래 열병을 앓은 걸로 보인다. 이번엔 그가 차마 외면할 수 없던, 군인과 경찰 그리고 국가가 길러낸 폭력조직인 서북청년단 등이 저지른 또 하나의 거대한 학살극이 그를 덮쳐왔다. 혼란스럽던 해방정국의 제주에선 광주에서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더 오랫동안, 더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작별하지 않는다> '1.결정' 중
그는 다시 더 먼 변방으로 향했고, 한참을 매달린 끝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썼다. 그는 이 책 '작가의 말'에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썼다"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가 세상에 나온 바로 다음 달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이어서 쓸 수 있었고, 다시 삼 년이 지난 2021년 비로소 이야기를 매듭지을 수 있었으니, 아마도 그는 첫 두 페이지를 쓴 그날로부터 7년간 한순간도 변방을 온전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바다 건너 제주의 어느 동굴 속에선가, 또 어느 땅속에선가 그대로 멈춰 있을 그날의 시간도 다시금 흐르게 될까. 꼭 그렇게 되길 빈다.
▲ 스웨덴 한림원의 마츠 말름 사무총장이 지난 10일 스톡홀름의 한림원에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
ⓒ AP/연합뉴스 |
중심과 변방을 갈라 보는 태도는 우리 안에도 있다. 노벨문학상이 오랜 세월 유럽과 북미 그리고 남성을 중심으로 돌면서 그 바깥에 변방이란 낙인을 찍었듯 우리도 우리가 중심이라 믿는 곳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서울, 남성, 자본, 권력, 트렌드... 따위가 지금 우리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하여 정치와 행정, 경제와 언론 그리고 문화 등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또 움직이는 거의 모든 권력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광주의 이야기라서, 저 멀리 제주의 이야기라서, 힘없는 이들이 겪은 일들이고, 벌써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우리 스스로 변방으로 밀어냈던 그 이야기들이 한참을 돌아 '노벨문학상'이라는 빛나는 이름에 싸여 우리 앞에 돌아왔다. 우리가 애써 지워왔던 그 변방에도, 아니 어쩌면 그 변방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깃거리와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일깨워준 셈이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광주와 제주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거냐'고 물어올 때, 우린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 또 더 많은 한국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며 또 다른 변방을 찾았을 때, 우린 그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이제 낡은 건 변방이 아니라 변방이라는 낙인찍기다. 더 늦기 전에 중심-변방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우리만의 이야기와 자원을 지키고 또 가꿔야 하지 않을까. 아직 세계에 들려줄 우리 변방만의 이야깃거리가 남아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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