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블루 카펫'에 서다
한강 작가는 역대 121번째이자 여성으로는 18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입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2000년 평화상을 받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1901년 이 상이 처음 수여된 이래 123년 만의 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정책주간지 'K-공감'에서 확인하세요.
한국인 최초
‘블루 카펫’에 서다
“내 소설의 모든 질문은
사랑을 향하고 있었다”
“친애하는(dear) 한강! 스웨덴 한림원을 대표해 따뜻한 축하를 전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제 국왕 전하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12월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2024 노벨상 시상식’에서 엘렌 맛손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이 한강 작가를 호명했습니다. 이날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에 이어 네 번째로 호명된 한 작가는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푸른 카펫이 깔린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갔습니다.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아든 한 작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국왕과 악수를 나누자 콘서트홀을 채운 1500명의 기립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 수상을 축하하는 음악이 연주됐습니다. 이날 한 작가는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상에 앞서 문학상 선정 기관인 한림원의 종신위원이자 스웨덴 소설가인 맛손이 시상 연설에 나섰습니다. 맛손 위원은 약 5분간의 연설을 통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맛손 위원은 “작가의 목소리는 매혹적일 만큼 부드럽지만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잔인함과 회복될 수 없는 상실을 말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강의 주요 작품을 관통하는 색상은 흰색과 빨간색”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맛손은 “흰색은 그녀의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눈(雪)으로 화자와 세상 사이 보호막을 긋는 역할을 하지만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하다”며 “빨간색은 삶,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통과 피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흰색과 빨간색은 한강이 작품 속에서 되짚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는 “한강의 작품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취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졌다. 또한 꼭 필요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작가는 역대 121번째이자 여성으로는 18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입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2000년 평화상을 받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1901년 이 상이 처음 수여된 이래 123년 만의 일입니다. 노벨상을 상징하는 ‘블루 카펫’을 밟은 한국인도 한 작가가 처음입니다.
한 작가가 받은 메달은 앞면에 알프레드 노벨(1833~ 1896)의 얼굴이, 뒷면에는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메달은 상자에 담긴 채 전달됐습니다. 특히 문학상 수상자의 증서는 다른 수상자들의 것과 달리 양피지로 제작돼 특별함을 더합니다. 올해 문학상 증서에는 스웨덴 한림원과 알프레드 노벨의 이름 아래 한 작가의 영문 이름이 특별한 서체의 금색으로 새겨졌습니다. 수상자 상금은 1100만 크로나(14억 3000여 만 원)입니다.
“문학, 생명 파괴 행위에 반대하는 일”
이날 시상식을 마친 수상자들은 스톡홀름 시청사 ‘블루홀’로 자리를 옮겨 ‘2024 노벨상 시상식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스웨덴 국왕과 총리가 참석하는 이 연회는 식사와 음악 연주 등을 곁들여 4~5시간가량 이어지는 행사로 연회 말미엔 수상자들이 짧게 소감을 밝힙니다.
한 작가는 이 자리에서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날 연회에서 한 작가는 약 4분간 영어로 소감을 이어갔습니다
한 작가는 어린 시절 비를 피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를 글 쓰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한 작가는 “제가 여덟 살 때 주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다른 아이들과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일을 기억한다”며 “길 건너편에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그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무리가 보였고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그 비에 팔과 다리가 젖는 것을 느끼면서 그 순간 저는 갑자기 이해하게 됐다”며 “저와 나란히 비를 피하는 사람들과 길 건너편에서 비를 피하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나’로서 살고 있었고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하며 경이로움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작가는 “책을 읽고 쓴 시간을 되돌아보면 저는 이 경이로운 순간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며 “언어의 실타래를 따라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내면과 마주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질문을 실타래에 맡기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다”며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에서 제기돼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언어는 이 행성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를 고집하며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한다”고 밝혔습니다.
“언어는 우리를 잇는 실”
시상식에 앞서 12월 7일 스톡홀름 한림원에서는 한 작가의 ‘노벨 강연(Nobel Lecture)’이 열렸습니다. 노벨 강연은 공식 시상식 전에 열리지만 사실상 수상소감으로 여겨지는 노벨상 행사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수상자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한 강연 원고는 그 자체로 문학의 정수로 여겨져 ‘귀로 듣는 문학’이라고도 불립니다.
한 작가는 이날 200여 명의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단에 올랐고 미리 준비한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차분한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한 작가는 지난해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장 사이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쓴 8편의 시를 스테이플러로 직접 제본한 시집을 먼저 회고했습니다. 한 작가는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하는 금실이지’라는 문장을 보았다”며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후 14년이 지나 시와 단편을 발표하며 ‘쓰는 사람’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편소설은 삶의 상당 기간과 맞바꿈되는데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한 작가는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며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며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한 작가는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됐다”며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背音)이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작가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며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돼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전했습니다.
한강, 노벨상박물관에 찻잔 기증
“찻잔은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 같은 것”
매년 노벨상 수상자들은 노벨상박물관에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물품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올해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12월 6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자 소장품 기증 행사’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작은 찻잔을 기증했습니다. 작은 찻잔은 노벨상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예정입니다.
한 작가는 작은 찻잔을 기증하며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어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 3. 보통 녹차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라고 쓰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루에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고 했습니다.
한 작가는 이날 오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찻잔을 기증한 이유로 “내게 굉장히 친밀하면서 소중하고 단순한 것을 건네고 싶었다”면서 “그 찻잔은 내가 책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고 답변했습니다.
아울러 한 작가는 이날 노벨상박물관 안에 있는 레스토랑 의자에 서명도 남겼습니다. 수상자들이 의자 좌판 아랫부분에 새기는 친필 서명은 노벨상만의 특별한 방명록으로 200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의자에 어느 수상자가 서명한 의자인지 표시해두지 않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식사 중 의자를 뒤집어보며 서명을 확인하는 이색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