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도 아이들이 있다... '들꽃'에서 발견하는 목소리
김성호 평론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번듯한 화단이며 온실에서만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오가는 길가에도 아무렇지 않게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는 한다. 들꽃의 존재를 생각하는 일, 그와 같은 마음의 귀함을 떠올린다.
2015년 작 영화 <들꽃>을 기억한다. 한국 독립영화계에 박석영 감독의 존재를 아로새긴 인상적 작품으로, 거칠지만 생명력 있는 연출과 연기가 날 것 그대로 담긴 작품이었다. 그는 이로부터 약 3년여의 기간 동안 '꽃 3부작'이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한다. 2015년 <들꽃>부터, 2016년 <스틸 플라워>, 2017년 <재꽃>에 이르는 프로젝트였다. 각기 1000명에서 2000명, 다시 5000명의 관객이 든 작품들은 분명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는 있었으나 흥행이라 부르기는 민망한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이들 작품을 한국 독립영화 가운데 기억하고 기록할 만한 흐름이라 여기는 이가 분명히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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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 스틸컷 |
| ⓒ 인디플러그 |
은수(권은수 분)와 수향(조수향 분), 그리고 하담(정하담 분)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만남은 얼마만큼 급작스럽고 폭력적이었던가. 다리 밑 공터를 맴돌던 은수와 수향에게 들려온 외마디 비명소리, 덩치 큰 남자가 작은 여자를 덮치는 상황 가운데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이다. 아무리 둘이라도 성인 남자를 쉽게 당해낼 수 있을까. 가지 말라는 아이와 가서 구해야 한다는 아이가 맞서다가 마침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은수와 수향, 그리고 하담의 만남은 시작부터 그토록 버거웠다.
기댈 곳 없는 현실 가운데 놓인 세 아이는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서로에게 더욱 의지하게 된다. 열여덟, 열일곱, 그리고 열여섯. 고작 한 살 나이가 무어라고 언니와 동생이 서로를 보듬고 기대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영화는 이들이 어찌하여 세상 가운데 홀로 나와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로 이들이 마주하는 비정한 현실을 비추어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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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 스틸컷 |
| ⓒ 인디플러그 |
영화는 그저 고난만을 그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들은 어떻게든 생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도우려 하고,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삶을 꾸려가려 시도하는 과정이 영화 가운데 등장한다. 물론 그 시도가 쉽게 성취되진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우리네 세상은 갖지 못한 이들, 기댈 곳 없는 이들에게 그리 너그럽지 못한 것이다.
<들꽃>의 분명한 미덕은 우리 사회 공동체 가운데 좀처럼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를 돌아보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더 화려하고 보기 좋은 것들만 따르는 시선 반대편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메마르고 강퍅한 땅이 있다. 그곳엔 은수와 수향과 하담과 같은 아이들이 저들을 노리는 이리 같은 이들 앞에 무방비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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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 스틸컷 |
| ⓒ 인디플러그 |
요컨대 영화가 그리는 건 폐허다. 우리 공동체 안의 폐허,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땅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 곳에, 그러나 온기 있는 이들이 있다. 꽃은 꽃이되 들판에 핀 꽃, 그렇다 하여 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들꽃>이 돌아본 세상이 어찌나 척박한지 당장이라도 꺾이고 짓밟힐 듯한 그 꽃의 오늘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적잖다.
불행히도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 가운데 엄연한 현실이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4년도 '청소년 통계' 자료는 가출을 경험한 미성년 학생 수가 무려 10만 명이 넘는다고 확인한다. 10만 명의 청소년이 집을 나와 홀로, 또는 또래집단 안에서 살아간 적이 있는 것이다. 가정이 가정답지 못해서, 폭력과 방임 속에서 견디다 못해 뛰쳐나온 미성년 아이들이 그토록 많다. 가정 밖 청소년의 존재가 꾸준히 확인되고 있으나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처, 또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통계자료는 없다시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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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 포스터 |
| ⓒ 인디플러그 |
낮은 곳으로, 또 못한 곳으로 좀처럼 가지 않는 시선이 이와 같은 작품을 통하여 가서 닿는다.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 아이들이 시선 바깥에서 사냥감처럼 숨죽여 존재한다. 어른들이 도리어 아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빚어진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제가 본 어른들을 닮아 간다. 어느 이파리 하나도 나무 전체의 말 없는 이해 없이는 물들지 않는다 했다. 영화 속 폭력과 배신의 대물림은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우리 사회를 학습한 결과다. 영화는 가까이서 그를 관찰하며 이들이 놓인 황폐한 상황을 관객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내도록 한다.
통상적인 작품에서 흔히 마주했던 문법, 극화된 장치들을 이 영화 가운데선 찾아보기 어렵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투박하고 거칠게 화면 밖 관객 앞에 내동댕이쳐진다. 아이들이 마주한 폭력이 관객에게도 그와 같은 강도로 닥쳐오도록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정제되지 않은 폭력적 행위며 언어로부터 관객이 느끼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듯, 극영화의 사실주의적 태도가 상당한 충격을 일으킨다.
곧 개봉을 앞둔 신작 <레이의 겨울방학>으로 돌아온 박석영 감독이다. 꽃 3부작부터 안온한 <레이의 겨울방학>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가 점차 풍요로워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없이 흔들리는 카메라가 땅에 굳건히 뿌리내린 채 지긋이 응시하기까지, 화면 가운데 선 아이들을 통하여 건네는 이야기를 오늘의 한국 관객들이 귀 기울여 듣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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