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평택…흔들리는 삼전, 일부 공장 멈춤까지
미래보다 눈앞 수익 집착
효능 다한 ‘리커버리 전략’ 고집
지난 14일 오전 11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가 위치한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의 상가 밀집 구역. 점심시간이 시작됐지만 공사 현장 인근 식당에서 안전모를 쓴 건설 노동자들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지난 2022년 근로자 6만여명이 평택캠퍼스 건설 작업에 투입된 후 보안 게이트에서 각 사업장까지 이어지는 출퇴근 행렬이 신도림역 ‘환승 지옥’과 흡사하다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공장을 가로지르는 왕복 8차로 삼성로에서 공사 자재를 싣고 달리던 덤프트럭 행렬도 자취를 감췄다. 현재 평택캠퍼스 공사 인원은 2만명 이하로 줄며 과거의 활기를 잃어버렸다.
평택캠퍼스 근처에서 공사 현장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식 뷔페를 운영하는 A씨는 “지난해에는 점심 한 끼에만 쌀 20㎏짜리 6포대를 쓸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1포대에 그친다”며 “식당에서 일하던 직원 8명도 내보냈다”고 했다.
건설노동자가 줄면서 인근 상권과 부동산 역시 침체를 겪고 있다. 황금 입지로 알려진 평택캠퍼스 앞 대로변 사거리 건물 2층 사무실 월세는 평당 4만원 수준까지 떨어졌다. 건물 창문에는 공실을 알리는 임대 문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ASML 등 장비 업체들이 들어간 지식정보센터 건물을 제외하고는 공실률이 70~80%에 달하는 곳이 많다”며 “공사 재개 날짜가 불투명한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말했다.
평택캠퍼스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의 칩 설계, 생산, 후공정까지 아우를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 기지다.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2030년까지 3개 공장(P4·P5·P6)을 추가로 지을 계획이었지만 올해 공사를 일부 중단하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지난 1월 클린룸 8개가 들어가는 대형 생산 시설인 P5 공장 기초공사를 멈췄고,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산을 동시에 할 수 있는 P4 공장은 설비 투자를 미뤘다. 가동 중이던 P2와 P3 공장 일부 파운드리 생산라인은 설비 전원을 완전히 꺼버리는 ‘콜드 셧다운’에 들어갔다.
황량해진 고덕동은 삼성전자의 현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파운드리 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고객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HBM은 SK하이닉스에 밀리고, 파운드리는 TSMC에 치이는 진퇴양난의 처지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선제적으로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선택과 집중’에 머뭇거리는 사이 경쟁사들은 기술 격차를 벌려가며 앞서나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삼성전자가 시장을 끌고 갈 수 있었던 ‘리커버리 전략’마저 효력을 다하면서 위기는 현실이 됐다. 리커버리 전략은 삼성전자가 경쟁사와 기술 격차가 벌어질 때 인력과 자본을 적극 투입해 수개월 내에 다시 선두 자리를 빼앗는 방식을 말한다. 삼성전자 엔지니어 출신의 한 부사장은 “예전에는 기술력에서 밀리면 연구·개발(R&D) 방향성을 틀어 다시 시작했고, 최소 3개월이면 경쟁사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이 무리한 지시에 따르지도 않고 주 52시간제 정착으로 밤을 새워 개발하는 게 어렵다. HBM 개발에 들어간 지 1년이 지났지만 경쟁사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기술력 문제 외에도 급변한 조직 문화가 리커버리 전략의 효용을 떨어뜨린다는 취지다.
삼성전자는 2020년 전후로 다가온 인공지능(AI) 혁신을 뒤로한 채 PC·스마트폰 메모리 시장에 안주했다. 당시 시장의 미래성보다 눈앞의 수익성에 집착한 경영진의 오판이 AI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도태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전자는 2015년 말 HBM 전담 개발 조직을 두는 등 관련 연구에 집중해 SK하이닉스보다 빨리 2세대 HBM을 양산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투입하는 자원 대비 HBM의 수익성이 저조하다고 판단해 2019년부터 조직의 인력을 줄이고 투자를 축소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3세대 HBM부터 SK하이닉스에 역전당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뿐 아니라 파운드리와 시스템LSI(설계) 등 비메모리 부문에서도 만성 적자를 보이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TSMC와의 격차는 분기마다 벌어져 지난해 4분기 49.9% 포인트에서 올해 2분기 50.8% 포인트로 확대됐다. 파운드리 물량을 TSMC가 독점하자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공정에서의 감가상각비 등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부 생산라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LSI가 설계한 ‘엑시노스 2500’은 기술력 문제로 삼성전자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엑시노스는 갤럭시 시리즈에 탑재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로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앞서 갤럭시 S22 시리즈에 탑재된 ‘엑시노스 2200’은 성능 저하와 발열 문제가 보고됐고, 후속작 엑시노스 2300은 공개조차 되지 못했다. 내년에 선보일 엑시노스 2500은 수율 문제가 불거져 갤럭시 S25 시리즈 적용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AP 시장에서 퀄컴과 대만 미디어텍의 양강 구도가 공고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 사업부마저 시스템LSI를 외면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부에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기술 중심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경영진이 기술보다 결과를 중심에 두고 의사결정을 했기 때문에 AI 시대를 꿰뚫어보지 못했다”며 “지금 적자 상태인 파운드리를 분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분사는 보류하되 설계, 제작, 패키징 중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부분에서 앞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경연 기자, 평택=윤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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