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가지 말고 여기로"…요즘 잘되는 '회사 익게' 어디
# 대기업 직장인 김 모(39) 씨는 한동안 사이버 명예훼손죄 고소를 고민했다. 직장인 익명게시판 앱 블라인드에 누군가 자신을 허위로 비방하는 글을 올렸기 때문. 이름 석 자가 안 적혔을 뿐, 충분히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해외에서 서버를 운영하는 블라인드 특성상 고소해도 결과가 신통치 못할 거라는 주위 조언으로 포기했지만,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다 결국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가 내부 고발과 정보 공유의 순기능이 있지만 명예훼손과 거짓 소문 확산 같은 부작용을 낳자, 대체품을 찾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회사에 건의할 수 있는 익명게시판을 사내 망에 신설하거나, 기존 게시판에 유사한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다. ‘블라인드 가지 말고 여기서, 건설적인 얘기를 나누자’는 취지다.
익명게시판 특허 내고, ‘매너 온도’도
그러자 회사는 익명 게시판에서 개인정보를 저장하지 않으면서 작성 글을 모아서 보여주는 기술을 2020년 9월에 회사 명의로 정식 특허 출원했다. 이를 사내에 공지하자 그제야 직원들이 익명 보장을 믿었고, 이후 익명 게시글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삼성SDS에 따르면, 지금까지 TALK 건의를 통해 사내 어린이집 입소 우선순위에 한부모인 직원을 넣고, 사옥 엘리베이터의 운영 로직을 바꿔 대기 시간을 줄이는 등의 직원들이 건의한 문제들이 빠르게 개선됐다.
LG이노텍은 지난해 6월 익명게시판 ‘이노 보이스’를 새로 만들었다. “회사 제도나 업무 환경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소통 창구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주니어 직원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제안 글을 익명으로 올리면 내용에 따라 담당 부서로 이관돼, 해당 부서 팀장이 직접 답변 글을 올리는 방식이다. 회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1800여 건의 익명 제안이 올라왔고, 이중 현재 검토 중인 100건을 제외한 모든 제안의 답변이 완료됐다.
이노 보이스를 통해 사내 복지 제도가 개선되기도 했다. 직원 가족의 고액 의료비 지출이 발생한 경우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장애인 가족의 재활치료비는 비교적 적은 금액이지만 오랫동안 반복해서 발생하는지라 여기 해당하지 않았다. 이노 보이스에서 이 점을 보완하자는 글이 올라왔고, 지난 11월 회사는 장애인 가족 의료비를 우선 지원할 수 있게끔 제도를 고쳤다. LG이노텍 관계자는 “익명게시판이지만 초기 일부 우려와 달리 성숙하게 운영되고 있어서, 문혁수 대표도 관심 갖고 이노 보이스를 자주 확인할 정도”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지난 2022년부터 운영하는 사내 익명게시판 ‘컴온(CommON)’에는 ‘매너 온도’가 있다. 중고장터 당근마켓에서처럼, 익명 글을 올린 이의 매너를 직원끼리 평가하고 볼 수 있는 제도다. 그 덕에 사실과 다른 왜곡된 글이 올라오면 구성원들의 자정이 이뤄진다고. 컴온에는 월평균 500건의 익명 제안이 올라오는데, 특히 구내식당 메뉴에 대한 의견이 많다고 한다. 이를 반영해 식사 대용 간편식 종류를 확대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고.
익명게시판 부작용…폐지 또는 속앓이
그러나 ‘익게’는 여전한 기업의 고민거리다. 좋은 취지로 운영됐다가도, 익명성에 기대 변질될 위험이 있기 때문.
엔씨소프트는 지난 5월 1일 자로 사내 익명 게시판을 실명 운영으로 전환했다. 이 게시판은 원래 게임 개발 같은 전문 업무 지식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익명으로 주고받는 지식 공유 공간이었으나, 사내 게시판 중 유일하게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다 보니 회사를 성토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는 “본래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활용되고 사례가 늘어났다”라며 실명으로만 글을 올릴 수 있게 했다.
사내 익명게시판 ‘나우톡’을 운영하는 삼성전자는 이와 별개로 회사에 대한 건의 사항을 국민 청원 방식으로 올리는 익명 게시판을 지난 2021년 열었다가 2023년 닫았다. 명목상의 이유는 ‘코로나 기간 부족했던 소통을 늘리려 열었다가 팬데믹이 끝나 닫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성 없는 의견을 적은 글이 공감을 받기도 하는 등 부작용이 많아 접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부작용이 있음에도 쉽사리 익게를 닫지 못해 고민하는 기업들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익명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이 단순한 불만 표출에 그치거나 기업 문화에 악영향을 미쳐 경영진도 고민한다”라며 “그러나 한 번 만든 제도를 없애는 건 더 어렵기 때문에 속앓이하는 기업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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