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책, 그중에서도 번역서예요. 책을 통해 다른 언어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 반드시 번역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 권의 책에 작가가 오롯이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언어로 재탄생하기까지는 번역가들의 노력이 뒤따라요. 최초의 출판 번역가는 아마도 이타적인 사람이었을 거예요. 글에 담긴 아름다움을 누군가를 위해 나누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특히 사람의 진심과 생각이 담긴 에세이에서는 더 그렇죠. <사치스러운 고독의 맛>, <좋아하는 마을에 볼일이 있습니다> 등을 번역한 일본어 출판 전문 번역가이자, 양질의 번역서를 소개하는 동네 책방 ‘번역가의 서재’를 운영하고 있는 박선형 번역가를 만났습니다.
살면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문학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오랫동안 일본에 사셨던 외할아버지를 통해 일본어와 일본 서적을 알게 되었지요. 유년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의 서재는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였어요. 외할아버지가 읽어주시는 동화책이나 잡지에 쓰인 문장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어느새 더듬더듬 따라 읽기 시작했죠. 그 후로도 외할아버지가 즐겨 읽으시던 일본 작가들의 책을 두루 접하게 되면서 일본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이후에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동시통역가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이후엔 출판사에 입사해서 출판 편집자로 수년간 일했고요. 출판 편집과 일본어 번역을 병행하다가 언젠가 제가 기획하고 직접 번역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 근무하는 동시에 번역가로 일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닫고, 본격적으로 번역에 집중하고자, 번역가로 데뷔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번역을 하면서, 어떤 책을 번역했을 때 가장 설렜나요?
미처 몰랐던 작가의 책이요. 번역을 의뢰받지 않았다면 제가 죽기 전까지 안 읽어봤을 것 같은 책을 만났을 때가 설레요. 심지어 책의 내용이 좋았을 때는 행운이라고 여기고 감사하지요. 번역가 이전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설레는 일이고, 번역가로서도 새롭게 발견한 좋은 책을 세상에 알릴 수 있어 두 배로 기쁜 일이에요.
번역가님만의 번역 기준이나 원칙이 있나요?
번역가마다 스타일이 다른데요. 개인적으로는 초고가 최종 원고라고 생각하고 번역하는 편이에요. 반면 러프하게 초고 번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만약에 번역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생길 때는 빈칸으로 둔다든지 아니면 그 문단 자체를 건너뛴다든지, 일단은 초고를 빨리 마무리하고 추후 수정을 여러 번 거치는 번역가들이 있는데 저는 완전 반대인 셈이죠. 그래서 남들보다 초고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교정을 보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시름 내려놓고 교정볼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해요.
그렇다면 번역할 때 지키는 규칙 같은 것도 있나요?
일본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가 많아요. 때로는 우리말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단어도 있어서, 풀어서 번역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 한 작품마다 단어장을 만들어요. 단어장이 쌓이면서 새로운 번역 작업을 할 때마다 도움이 많이 돼요. 다른 작품을 번역할 때 참고해서 적절한 표현을 덧붙일 수도 있고요. 일본어 사전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요. 그럼에도 항상 새로운 단어장과 우리말 사전을 두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스럽고 새로운 표현이 없을까 궁리해요. 실제로 일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들이는 시간은 짧은 편인데, 옮긴 글을 매끄럽게 다듬고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을 지어내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요.
기술이 발달할수록 출판에서 번역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단순히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까지 아울러야 하죠. 번역가가 단순히 글을 옮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문해력과 독해력도 있어야 하고, 글을 쓰는 재능도 있어야죠. 이렇듯 번역은 굉장히 복합적인 일이지만, 출판계의 번역 환경이 열악한 건 사실이에요. 제가 ‘번역가의 서재’를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는 이유도 더 많은 번역가들이 독자와 만나면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좋은 번역서를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죠.
번역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어렸을 때 번역서를 좋아했던 이유를 떠올려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가 제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 빠져든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통해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서를 통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직접 구사하지 않아도 그 나라의 책과 작가를 알게 된다는 게 굉장히 멋지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책 한 권이지만 그 안에서 세계는 상상하는 만큼 넓어질 수 있고, 오롯이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신비로운 일이에요. 그래서 번역서를 읽으면서 작은 설정에서부터 커다란 세계관까지 상상력을 펼쳐볼 수 있지요. 또 나라마다 다른 언어가 지닌 특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롭고, 이국의 문화와 역사를 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점도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독자로서, 번역가로서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독자로서 좋은 책은 다시 읽고 싶고,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인 것 같아요. 서점에 입고하는 책을 고를 때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요. 내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인지 말이죠. 번역가로서는 이 책은 내가 가장 먼저 읽고 번역하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책이 좋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매진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요.
식상한 대답일지 모르지만, 번역이 정말 재미있어요. 최근에는 책 집필과 번역을 병행하고 있는데, 제가 번역 작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더라고요. 번역할 때는 정말 몰입하고 즐거워서 작업 속도도 굉장히 빠르고요. 반면 글을 쓸 때는 몰입하기 힘들어요.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보니 글을 쓰는 게 재미없다기보다, 제게는 번역이라는 작업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져서 그런 것 같아요. 번역은 작가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유익하게 들려주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작업하면서 내내 보람을 느껴서인지 없던 기운도 솟아나요. 작가와 번역가는 결국 글을 쓴다는 점에서 한 끗 차이 같은 일처럼 보이지만 무엇이 단순히 쉽다, 어렵다는 비교보다는 그 일을 향한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5년 동안 서점을 운영하면서 생긴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번역가의 서재’는 단골 독자분들이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겸손해서가 아니라 저는 이 공간을 열어드리는 서점지기일 뿐이고요. 책이 좋아서 책을 매개로 이곳에 모였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때로는 위로받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 경험들을 함께할 때마다 뭉클해져요. 어느새 하나의 사랑방으로 손님들께 다가가고 있더라고요. 저 역시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얻고 때론 위로를 받으며 작든 크든 무슨 일이든 감사하게 여기게 된 것이 서점을 운영하면서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자연스럽게 한 권 한 권, ‘번역가의 서재’가 채워지고 있네요.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요. 다른 언어에 흥미를 느끼고, 번역을 통해 서점까지 운영하게 된 게, 돌아보면 정말 신기해요. 처음 서점을 시작할 때 사랑방 같은 곳을 만들 생각은 없었고, 널리 알린 적도 없지만 서재의 책들처럼 하나, 둘 모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런 특별한 공간이 되어 있더라고요. 동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로 경험을 쌓고 취향을 공유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든 결코 의도해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묵묵히 하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결국 서로서로 이어지게 된다고 믿어요.
글. 정규환/ 사진. 이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