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모르겠어요"… '과거 상자'에 다가가보세요

윤지애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4. 10. 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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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 우울증의 원인이 뭔가요?" 진료시간에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항상 대답이 어렵습니다. 우리 심리 상태의 이유를 딱 한마디로 정리해 말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 진단과 치료에서도 원인을 밝히기보다는 증상 관리와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 회복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자신이 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모르겠다, 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종종 저도 함께 길을 잃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물론 이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은 정신과 의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자기 감정의 특별한 이유를 현재에서 찾지 못한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봅니다. 대부분의 트라우마는 스스로 '자연회복' 되기 마련이지만 일부는 아주 오래 전 과거의 일이라도 그것이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십 수년, 혹은 더 긴 세월동안 풍화되지 않고 그 여파가 현재에 도달하기 충분합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위로의 말도, 그동안 스트레스를 해소해줬던 활동들도 트라우마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 기억과는 생성 메커니즘, 저장 방식이 다르다고 알려졌습니다. 때문에 다루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당사자도 꽤 시간이 지난 탓에 '그 일'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진다 하기도 합니다. 이제 '그 일' 탓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정도에 이르기도 하지요. 결국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하며 오래 함께한 어려움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우울감, 불안감, 두려움, 죽고 싶은 마음은 과거의 '그 일'과 더 이상 연결시키기 어려워져 버립니다. 

어째서 오래 전 트라우마가 지금 현재를 사는 나를 '살고 싶지 않게' 하는 걸까요? 정신의학적으로 트라우마 사건이란 죽음 또는 심각한 부상을 겪거나 위협을 당한 경우, 그리고 모든 종류의 성폭력에 의한 사건이 해당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심리적 충격을 주는데, 감히 그 충격 정도를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트라우마 경험을 한 뇌와 몸은 그저 깜짝 놀라는 정도가 아닌 생존에 기반한 반응으로 대응하며, 그 에너지는 몸속에 갇힙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트라우마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기 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방사선을 뿜는 방사성동위원소와 유사합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반응 중 하나는 '인지가 예전과 다르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은 위험하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사건을 겪은 생존자는 세상을, 그리고 스스로를 대하는 인지 체계가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세상은 그 동안 내가 살아오던 그 세상 그대로인데 사건을 겪은 생존자는 이전과 달리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만약 주변 사람이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상황이 잘 풀려 정말 좋은 일들이 종종 생긴다면 다행히 트라우마의 자연회복은 촉진됩니다. 하지만 일부는 그럼에도 변해버린 인지 방식이 오랜 굳어지고, 이제는 '무엇 때문에 힘든가'라는 질문에 쉽사리 오래 전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기가 어렵게 됩니다.     

트라우마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굳게 닫아놓은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꼭 상자를 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그것이 그렇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도, 치료자에게도 몹시 힘든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과거의 고통 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의 괴로움이 사실은 지금의 어려움이 아니라 과거의 '그 일'에서 비롯된, '상자 안에서의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흔한 '반응'을 겪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마리를 찾는 것은 '치료 시작점'을 찾는 것과도 같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상자를 다루려 하고 있다면 이미 엄청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트라우마 기억에 다가가는 것은 그 일에 대해 오랜 시간 가져왔던 죄책감이 사실은 그럴만 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금방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버텨온 당신을 적극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또 그 일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흘렀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때보다 조금은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있었던 시기가 어린시절이었다면 지금은 당신은 분명한 성인이 돼있을 겁니다. 성인이 됐다는 것은 이전과 다르게 최소한의 힘과 권한을 가지게 된 상태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힘은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잘 지냈던 못 지냈던 상관없이, 여전히 버텨오고 견디어 지금 여기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being)'한 당신에게 한 번 더 무한한 칭찬을 드립니다.

[본 자살 예방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및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대한정신건강재단·헬스조선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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