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감독 아버지 작품 고사한 배우 딸, 차마 말 못 한 속사정
[김상목 기자]
연극배우 '노라'는 공연을 앞두고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구석에 숨는다. 애가 탄 스태프들이 배우를 찾으러 곳곳을 수색해 간신히 데려왔지만, 숨 쉬는 것도 답답해하는 주연배우 탓에 다들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명연기를 펼치고 커튼콜에서 박수갈채를 받는다.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얼마 후,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 참석차 오랜만에 어릴 적 살던 집을 찾는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 여동생 '아그네스'가 언니를 맞는다.
이혼 후 떠났던 아버지 '구스타브'가 오랜만에 돌아왔다. 명성 높은 영화감독이지만, 자녀들과는 관계가 원만치 않다. 그래도 인사를 나누는 동생과 달리 노라는 애써 회피한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큰딸에게 용무가 있다. 그는 딸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며 오랜만에 준비하는 장편영화 주인공 역을 제안한다. 그러나 노라는 아버지와 일하길 원치 않는다. 구스타브는 우연히 만난 할리우드 스타 배우 '레이첼'의 적극성에 호감을 느껴 주연을 맡긴다. 노라는 생각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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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티멘탈 밸류> 스틸 |
| ⓒ 그린나래미디어㈜ |
두 딸은 자신들이 한창 성장할 때 집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앙금이 두껍게 쌓여 있다. 한창 예민한 10대 시절 부모의 불화를 목격한다. 그녀들에겐 부모의 애정이 가장 절실할 때 자신들 곁을 떠난 그가 곱게 기억될 리 없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부녀 관계라는 혈연을 부정할 수도 없다. 역사학자로 단란한 가정을 꾸린 동생 아그네스는 그럭저럭 아버지와 소통하며 언니와 사이에서 중재를 도맡지만, 언니 노라는 그저 아버지와 엮이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구스타브는 그런 딸들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십여 년 만에 도전하는 장편 신작 작업에 분주하다. 노라에게 제안했던 주인공 배역도 운수가 좋은지 세계적 유명 스타 레이첼 덕분에 채워지고, 투자문제도 수월해졌다. 한데 굳이 사이가 좋지도 않은 큰딸에게 배역을 맡기려던 이유가 따로 있는 듯하다. 새 영화 각본은 감독의 어머니, 즉 자매의 할머니와 얽힌 사연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 게다가 해당 사연은 누구라도 공개를 꺼릴 법한 기억이다.
노라의 고민은 역할을 거절한 후에도 끊기지 않는다. 성공적인 배우 경력을 쌓아가고 있지만, 공연에 오르기 전 보이던 불안증은 점점 심해지기만 한다. 가정을 꾸려 안정된 삶을 사는 동생과 달리 번득이는 예술가 기질과 쌍으로 예민하고 공허한 정서를 간직한 그녀의 방황은 주변 사람들의 염려를 불러온다. 한편 아그네스는 과거에 자신이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했던 경험을 반복하듯 사랑하는 아들을 신작에 출연시키길 원하는 아버지와 충돌하고, 작품의 배경인 할머니의 숨은 과거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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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티멘탈 밸류>스틸 |
| ⓒ 그린나래미디어㈜ |
각본은 제법 잘 나왔다. 오랜 동료 제작자와 의기투합했고, 할리우드 톱스타 출연 덕분에 화제성도 얻었다. 이만하면 제법 순항하는 셈이다. 그러나 넷플릭스에서 주요한 투자를 받은 이유로 극장 개봉 여부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 구스타브는 극장 상영이 당연하다 생각해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창작자가 재량을 갖고 자유롭게 전권을 행사하던 시대는 한참 전에 종말을 고했다. 휴대전화를 끼고 작업 과정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관계자가 사방에 잔뜩 깔려 있기에 감독은 답답함과 혼란에 휩싸인다.
아그네스 가족을 방문하며 손자에게 할아버지 노릇을 하던 감독은 자신이 예술가로서 긍지를 가진 영상 촬영을 가르치며 즐거워한다. 그는 두 딸을 사랑하지만, 예술가의 자유는 평범한 이들의 도덕률을 벗어나야 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는다. 요즘엔 다들 소시민의 윤리에 얽매이다 보니 참 예술을 볼 수 없다는 지론. 그러나 가족에 상처를 입혔던 과거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아버지의 면모에 아그네스마저 질색한다. 과거 자신에 이어 소중한 자식도 동원하려는 의도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렇게 기껏 재회한 자녀들과 관계 회복에 애를 먹으면서도 구스타브는 진정한 배우가 되려는 열망을 품고 기꺼이 자신의 신작에 참여한 레이첼과 스승과 제자, 혹은 유사 부녀 관계를 형성하며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신의 가족사가 기원인 각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배우는 감독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 의욕에 감독은 흐뭇하지만, 레이첼은 배역에 천착할수록 심리 분석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체 왜 주인공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걸까? 그게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닌 듯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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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티멘ㄴ탈 밸류> 스틸 |
| ⓒ 그린나래미디어㈜ |
연기 인생을 걸고 도전한 재능 넘치는 스타 레이첼의 딜레마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연구하고 이입해도 그녀는 작중 주인공의 심리를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힘들다. 자신의 갈수록 해소와 멀어지기만 하는 불안을 풀 길이 없는데, 자신 이전에 제안을 받았다는 노라에게 만남을 청해 대화해 보니 문제의 본질에 닿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핵심을 아는 것과 해결하는 건 또 별개 문제다.
연기자인 노라는 자신과 아버지가 예술가 기질을 공유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석의 같은 극 마냥, 그래서 일부러 더 밀어내고 거부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아니라도 대외적으론 성공적인 경력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커지는 불안증은 점점 그녀를 겉잡을 수 없는 위기로 내몬다. 언니의 위험 징후를 염려하며 이 모든 화근의 근원(?)이자 아버지의 신작 출발점인 할머니의 비밀을 캐기 시작한 아그네스 역시 마침내 확인된 충격적 과거에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고집스럽게 예술혼을 추구하며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스스로 멀어졌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고집과 고독을 판박이로 물려받은 장녀, 두 불통을 어떻게든 이으며 가족 문제의 기원에 접근하는 차녀, 정극 연기에 도전하다가 타인의 가족사에 깊숙이 들어온 배우의 4인 4색 충돌 속 조화가 팽팽한 긴장과 끝을 짐작하기 힘든 전개로 유려하게 흘러간다. 한 길 사람 속 생각을 파악하기 어렵고, 핏줄이란 게 계산과 합리로만 측량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가 모범 예시처럼 화면을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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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티멘탈 밸류> 스틸 |
| ⓒ 그린나래미디어㈜ |
전통적인 가족물에 지루할 틈 없도록, 영화 한 편에 참 많은 장치를 감춰놨기에 보물찾기의 재미가 넘치는 작품이다. 악연에 가깝던 구스타브와 노라의 동질성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표현주의 이미지로 '한 큐'에 정리해 버린다거나, 기구한 가족력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3대의 인생이 가득 깃든 '집'이란 공간 자체가 1인칭 시점으로 그들의 과거 내력을 해설하는 장면에선 경탄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복선적 연출의 묘미에 추가해 구스타브가 처한 신작 연출 과정의 난관은 대놓고 시사적이다. OTT 스트리밍 서비스와 극장 상영 사이의 '홀드백(유예기간)' 문제처럼 국내 영화계에서도 논란인 부분을 빼먹지 않고 발언한다. 연기와 실제 삶의 상관관계, 예술과 윤리라는 영원한 난제까지 동시대 화두로 관객이 게으를 틈 없게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숙제를 떠안지만 뭔가 개운한 기분이 드는 작업인 셈이다.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가는 레나테 레인스베, 북유럽을 대표하는 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영화 내내 펼치는 '밀고 당기기'는 중력의 오묘한 조화처럼 과연 저 부녀의 미래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품게 자극한다. 정교한 인간 드라마를 떠받치는 건, '노르딕' 풍의 정석이라 할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역인 집이다. 삼박자 척척 맞는 '잘 만드 영화'가 그립다면 제목처럼 '평범해 보여도 뜻깊은 의미'를 담은 이 영화를 권한다.
<작품정보>
센티멘탈 밸류
Sentimental Value
Affeksjonsverdi
2025 노르웨이 드라마
2026.02.18. 개봉 133분 관람가
감독 요아킴 트리에
각본 요아킴 트리에, 에스킬 보그트
출연 레나테 레인스베, 스텔란 스카스가드, 잉가 입스도테 릴리오스, 엘 패닝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라이카시네마, ㈜제이원 인터내셔널 컴퍼니, ㈜모비데이즈
2025 78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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