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가 때려서 인쇄하던 그 시절

PC에서 작업한 문서나 그림을 종이에 인쇄하는 '프린터'는 예전엔 가정 필수품이었다. 그 당시 PC를 구입할 때엔 이 프린터가 패키지로 함께 딸려왔기 때문에, 집 안에 고이 모셔둔 비싼 가전제품 취급을 받곤 했다. 대학생이라면 워드 프로그램으로 대학교 과제물을 정성껏 출력해 제출하면 기분이 아주 좋았다. 교수님이 매기는 점수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 당시 인쇄를 했던 순간을 추억하면 참, 시끄러웠다. 바로 도트 프린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잉크젯과 레이저 프린터가 대중화되기 전 그 시절 도트 프린터를 회상해 본다.


타자기에서 발전했다??

▲ 라인 프린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프린터는 충격식과 비충격식으로 나뉜다. 충격식 프린터는 말 그대로 때려서 인쇄하는 프린터다. 우리에게 익숙한 잉크젯, 레이저 프린터는 비충격식 프린터고, 지금 설명할 충격식 프린터의 발전형이라 볼 수 있다. 프린터 초기에는 충격식 프린터가 대부분이었다. 그중 라인 프린터는 다양한 문자가 새겨진 체인이나 드럼을 사용해 문서를 찍는 방식이다. ‘다양한 문자’로 짐작할 수 있듯 그림은 출력할 수 없다. 해당 프린터는 실질적으로는 타자기의 발전형이라 볼 수 있다.


▲ 고무 도장 방식 아타리 1027 데이지 휠 프린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또한, 충격식 프린터 중에는 데이지 휠 프린터라는 것도 있다. ‘휠’답게 활자가 체인이나 드럼이 아니라 원반에 둘러 배치됐다. 데이지는 문자판이 꽃 모양이라 데이지라 부른 것이다. 해당 방식은 문자판을 교체할 수 있던 것이 특징이다. 즉 서체를 변경할 수 있었다.


▲ 엡손 LQ 850 도트 프린터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중화된 충격식 프린터는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다. 줄여서 도트 프린터. 앞서 언급한 라인 프린터의 발전형이다. 무엇보다 그림 인쇄가 가능했다. 그림을 그려주는 PC라니! 출시 당시엔 정말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인쇄의 혁명이었단다.


시끄럽고 튼튼하고 인쇄 비용이 저렴한 도트 프린터

▲ 엡손 VP-500 도트 프린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도트 프린터. 앞서 언급했듯 아주 시끄러운 프린터다. 종이 위에 잉크가 묻은 리본을 놓고 프린터 헤드가 특정 핀을 때려서 종이에 잉크를 찍는다. 이 찍는 단위가 점(도트)이다. 미리 그려진 문자를 때려서 새기는 라인 프린터와 달리 점으로 표현하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 Tally Genicom T2240의 헤드. 24핀 헤드다. 저 헤드가 튀어나와 종이를 때려서 잉크를 찍는다<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또한, 프린터 헤드가 정밀할수록 더 미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9핀, 24핀 등이 많이 쓰였는데 9핀의 경우 사실상 18핀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글자가 복잡할 경우 24핀을 사용했다. 즉 24핀으로 인쇄하면 더 상세하게 인쇄할 수 있다. 점묘화를 그리는데 점의 크기가 작아서 세밀한 묘사가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단, 물리적으로 24핀에 충격을 주어야 하기에 굉장히 시끄러웠다. 예를 들어 ATM에서 통장 정리를 하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제법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해당 기기 안에서는 도트 프린터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통장도 이 정도인데 가로줄이 긴 것을 인쇄할 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소음이 크게 난다. 그런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장점인 그림 출력 가능이 워낙 압도적이라 과거 오피스에서 많이 사용됐다. 문자는 물론이고 도형, 그래프도 인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점은 더 있다. 잉크젯이나 레이저에 비해 인쇄 비용이 아주 싸다. 내구성도 뛰어난 편이라 관공서 등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출력 속도도 그저 때리면 되기에 상당히 빠른 편이다. 잉크젯처럼 노즐을 뚫거나 레이저처럼 드럼을 달굴 필요가 딱히 없다.

편집자의 실제 에피소드

대학교 1학년 새내기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 누나와 공용 전산실에서 리포트 출력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어찌나 설렜는지, 도트 프린터가 3-4대 동시에 돌아가는 시끄러운 혼돈의 도가니탕 속에서도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로맨틱한 장면의 배경음악이 도트 프린터 소음이라니... 하지만, 인쇄가 끝나고 뭐라 말을 했던 그녀의 음성은 도트 프린터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는 않았다. 분명 고맙다고 했을 것 같다. 아..닌..가?


구멍 숭숭 뚫린 종이를 사용했다고?

▲ 종이 양 옆에 천공이 있는 전산용지<이미지 출처: 오피스나라>

도트 프린터는 양 옆에 구멍이 있는 전용 용지를 많이 사용한다. 구멍은 트레이 양 옆에 있는 롤의 돌기에 걸리게 만든 것으로 세로로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다. 서류용으로는 인쇄 후에 해당 구멍을 다 뜯어야 비로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용지에 따라 절취선을 넣어 둔 친절한 제품군도 있었다지만, 힘 조절을 잘 못하면 본문도 살짝 찢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 현재 다나와에서도 도트 프린터를 검색할 수 있다. 가격은 잉크젯 대비 저렴한 편은 아니다

그 당시 대학교 공용 전산실 한쪽에는 이 도트 프린터로 인쇄한 종이를 정성스레 뜯고 정리해 스테이플러로 찍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종이를 넣을 때 오른쪽 다이얼은 왜 그리 뻑뻑했는지... 이런 고충을 제조사가 배려했는지.. 도트 프린터가 사라지기 직전엔 A4 그대로 넣어서 인쇄하는 기기도 출시됐었다.

도트 프린터는 특히 군대 행정반과 인연이 깊다. 워낙 내구성이 뛰어나고 유지 보수 작업이 먹지 역할을 맡는 리본만 갈면 끝나기 때문에 행정반에 들어가면 으레 도트 프린터의 강렬한 소음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단, 인연이 깊은 것뿐이며 사실 해당 프린터와 엮이면 지저분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일단 리본을 갈다가 손에 먹지가 묻으면 수습불가의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건 요즘 레이저 프린터의 소음도 마찬가지지만.

편집자의 실제 에피소드

신병훈련소에 입소해 악명 높은 PRI 주간, 컴퓨터를 할 줄 아는 신병 있냐는 방송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행정반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물론 PRI 훈련을 조금이나마 열외할 마음도 있었지만, 간만에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를 느껴보려는 욕망이 더 컸다. 하지만, 행정반에 부른 이유는 이 도트 프린터의 리본을 교체하라는 것. 급지만 해봤지 리본은 갈아본 적이 없어서 정말 곤욕을 치렀다. 두 손은 이미 시커멓게 변했고 얼굴까지 리본의 잉크가 묻어 작업이 끝나고 PRI에 복귀하는 순간 조교가 안 씻고 다닌다고 굉장히 혼을 낸 기억이 있다. 그때 조교 55사단 신병교육대 4소대 이X민 일병 보고 있나? 난 잘 있다.


프린터는 죽었지만, 죽지 않아요~

▲ 빅솔론 SRP-270. 도트 프린터는 영수증 프린터로 잘 쓰이고 있다

현재 도트 프린터는 일부 은행에서나 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었다. 잉크젯 대비 장점이 적은 편이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마저도 사각형이 그려진 전용지에 인쇄하는 것이긴 한데, 위치를 잘못 맞추면 이른바 '삑사리'가 나기에 밀려 찍히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 실제 요즘 사용된다는 교외체험학습 인쇄물의 한 종류

도트 프린터는 사라졌지만, 잉크젯이나 레이저젯 프린터는 요즘 부모님들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한다. 학부형이라면 체험학습 신청서, 결석계, 기출문제, 학습 자료 등 출력해야 할 자료가 꽤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취학 아동의 부모도 색칠공부용 밑그림 출력용으로 프린터를 종종 사용하게 된다고 한다. PC방도 요즘엔 인쇄 서비스를 안 하는 곳이 많아 학부모들의 카페나 각종 커뮤니티 등에서 10만 원대 레이저 프린터를 추천하는 글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처럼 언젠가 프린터를 한 대 사야 할 때가 찾아올 수 있다. 당장은 프린터가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자녀 교육'이라는 무거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도트 프린터는 아니어도 프린터는 꼭 해야 할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노래를 불러본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프린터를~♬


기획, 편집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글 / 곽달호 news@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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