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영화’의 밍크코트 장면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연말이 되면 여러 매체에서 ‘올해 개봉 영화 베스트’를 선정할 텐데, 외국 영화 중에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수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무서운 장면 하나 없는데 정말 무섭다’ ‘예술영화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음향효과 때문에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입소문 덕분에 국내에서도 20만 관객을 모았다.
영화는 한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정적인 카메라워크로 따라간다. 그런데 깨끗하고 단정한 실내에 아득하게 불길한 소음이 새어 들어온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총성, 비명… 예쁘게 가꾼 정원 너머로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너머 음침한 건물들에서 때때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이곳은 학살의 장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 실존했던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집이다.
■
「 20만 관객 ‘존 오브 인터레스트’
유대인 고급 옷 뺏는 장면 강렬
당시 정서 ‘트럼프 현상’ 닮아
‘악의 평범성’ 예방 대책 있어야
」
섬세하고 입체적인 소리 효과로 참상을 직접 보지 않고도 상상하게 되고, 그 소리에 아랑곳없이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 집 사람들에게서 순간순간 소름이 끼치게 된다. 수용소장 회스가 집에서는 자상한 가장인 것도 씁쓸하게 인상적이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잘 가꾼 집과 정원에 집착하는 그의 아내다. 글레이저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하며 내내 염두에 둔 ‘악의 평범성’을 특히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악의 평범성’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평범한 사람이 도덕적 반성 없이 그저 평범한 욕망을 위해 폭력적 시스템에 참여함으로써 극악무도한 행위의 공범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TCO(주)더콘텐츠온]](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12/06/joongang/20241206012236795cfcx.jpg)
영화에는 수용소장 아내가 어디선가 전달되어 온 옷가지들을 고용인들에게 나누어준 후 자신은 호화로운 밍크코트를 입어보는 장면이 있다.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수용소에서 최후를 마친 유대인의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희생당한 유대인이 본래 부유한 상류층이었음도 유추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수용소장 아내가 경제적 계층 상승의 상징과도 같은 자신의 집에 집착하는 모습, 그리고 유대계 셀럽들이 지금은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장면과 맞물려 있다.
홀로코스트에 깔린 경제적 계층 갈등
사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는 인종주의 기저에 경제적 계층 갈등 문제가 얽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를 위해 돈을 찍어내다 보니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대공황까지 덮쳐 경제 불안과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다. 이때 나치는 “민중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대중의 불만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게 돌렸다.
특히 유대인의 경우, 실제로는 그 경제적 계층과 사상이 다양했지만, 그들 중 눈에 띄게 성공한 기업인·문화예술인·진보 지식인들이 많았기에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서민 대중의 경제적 불만이 쌓여가고, 부·명성·지식을 갖춘 엘리트 계층과 대중이 괴리되고 적대감이 커지는 현상은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상황과도 통하는 데가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해 20세기 서양사에 정통한 사학자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TCO(주)더콘텐츠온]](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12/06/joongang/20241206104621236vukn.jpg)
Q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밍크 코트 장면을 보니 유대인 학살에 경제 계급 문제도 컸던 것 같습니다.
A : “그렇죠. 계급적 문제보다도 디스퍼제션(dispossession·약탈)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수용소장 가족이 희생자 옷을 갖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고 약탈인데 국가가 그걸 합법화한 것이죠. 수용소의 경우뿐만 아니라 초기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추방할 때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떠난 물건들을 경매로 팔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어요. 대다수 인간에게 있는 부와 물건에 대한 욕망, 잘사는 이웃에 대한 질투, 이런 것을 국가가 자극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같은 체계적인 억압과 학살에 동참하도록 하는 유인책이었던 것이죠. 나치 독일에서만 벌어졌던 일도 아닙니다. 최근 들어서 이러한 디스퍼제션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Q : 잘사는 자들에 대한 질투라면 인종주의보다 공산주의가 어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A : “나치가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민족끼리’는 평등하게 잘 살아야 하고 유대인들·비(非)아리아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우리가 골고루 나눠 가지는 건 괜찮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거죠. 독일인들끼리 계급투쟁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적을 외부로 돌린 겁니다.(게다가 공산주의는 사유재산과 종교를 부정해 전통적 가치관과 정면충돌했고 1919년 ‘스파르타쿠스 무장봉기’가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기도 했다.)”
Q : 진보 지식인들과 대중의 정서가 괴리된 상황에서 발터 베냐민 등 유대계 진보 지식인이 많았던 것도 상황 악화에 기여했을까요. 나치의 선동 중에 ‘유대인 볼셰비즘’(공산주의가 유대인 지배의 도구라는 음모론)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A : “소위 ‘유대인 빨갱이’ 음모론이죠. 심지어 그건 미국에서도 그랬어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직후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유대계 미국인 공산당원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관련 기밀 정보를 소련에 넘긴 혐의로 사형당한 사건) 이후 많은 유대인이 고초를 겪습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사진제공=아마존]](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12/06/joongang/20241206012238253uoup.jpg)
미국 진보 엘리트와 대중의 괴리
Q : 이번에 트럼프를 찍은 미국 서민이 민주당 지지 엘리트 계층을 바라보는 시선도 당시 독일 서민이 유대인 엘리트 계층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입니다.
A : “그런 느낌을 갖는 거죠. 그들 시각에 ‘진짜 미국인’이 아닌, ‘우리 미국의 고유한 가치-기독교, 이성애 등-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 돈을 많이 벌고 럭셔리하게 살고 있고, ‘우리 진짜 미국인’ 노동자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거죠. 그래도 오바마(전 대통령) 때만 해도 노동자 계급(권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힐러리 클린턴(전 국무장관), 바이든(대통령), 해리스(부통령) 등 미국의 리버럴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성소수자·이민자 권익만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백인 노동자 계급이 가장 희생자다, 흑인보다도 희생자다’ 하는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가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트럼프야말로 노동자 계층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그들을 끌어안는 제스처를 하니까 지지하는 거죠.”
분명히 말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이 악(惡)이라는 것도, 히틀러 지지자들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트럼프 지도부와 지지자들 모두 ‘악의 평범성’의 위험을 늘 인지하지 않으면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또한 진보 정치인·지식인들도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과 정서를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한 채 독선적인 이상론만 고집하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물론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모두가 보면 좋은 영화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불효자보다 낫다" 자식 대신 월 300만원 주는 '이것' | 중앙일보
- "계엄 환영, 간첩 사형해달라"…당당하다던 뮤지컬 배우 결국 | 중앙일보
- "짜게 먹고도 100살 살았다" 이런 노인들의 비밀 | 중앙일보
- "한국 미쳤다, 계엄 2시간만에…" 해외서도 감탄한 이 장면 | 중앙일보
- 조영남 유서 공개 "유산 4분의1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 중앙일보
- [단독] 평소 "싸우다 죽어도 여한없다"…윤 엇나간 자기확신 | 중앙일보
- "박정희 멋진 남자" 20년전 발언에…공유 "정치적으로 이용당해" | 중앙일보
- [단독]‘수능만점’ INTP 고3, 비결은?…매일 이 루틴 지켰다 | 중앙일보
- 서태후가 즐긴 '회춘의 음식'…100만원 새둥지 그 맛의 반전 | 중앙일보
- "명령인 거 아는데 진정해"…계엄군 설득한 '707 출신' 배우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