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커피 대신 맥주 마시는 사람들

김종섭 2026. 5. 1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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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여행기] 생수보다 맥주가 싼 체코

[김종섭 기자]

프라하의 한 로컬 마켓에 들렀다가 눈을 의심했다. 진열대에 놓인 500ml 용량의 하이네켄 가격표에 단돈 18.9코로나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340원 정도다.

하이네켄은 본래 네덜란드 브랜드지만, 유럽 내 생산망이 워낙 잘 갖춰져 있어 물류비와 관세가 낮기에 이토록 저렴한 가격이 가능하다고 한다. 유통 구조의 효율성이 소비자에게는 커다란 혜택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백화점 냉장고 안, 하이네켄 캔 맥주 위에 선명하게 붙어 있는 18.9코로나 가격표
ⓒ 김종섭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 4캔을 만원에 파는 행사를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물가 상승 탓에 4캔 묶음 대신 '3캔 9,000원'으로 행사 단위를 낮추는 모습도 보인다고 한다. 한 캔에 3,000원이 훌쩍 넘는 셈이니, 1,300원대인 프라하의 마켓 맥주값은 한국이나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높은 주류 가격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수치이다. 애주가라면 누구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매력적인 가격이 아닐 수 없다.

체코에서 생산되는 로컬 맥주들의 정확한 가격 체계까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인 하이네켄이 이 정도 가격이라면 현지 맥주들의 접근성 또한 얼마나 좋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특히 식당이나 카페로 가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식당에서 파는 작은 병 생수(330ml)는 보통 40~60코로나를 훌쩍 넘기지만, 500ml 생맥주 한 잔은 50코로나(약 3,500원) 미만인 곳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보다 맥주를 먼저 선택하게 되는 합리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체코의 독특한 물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수돗물 수질을 신뢰해 그냥 마시는 현지인들과 달리, 석회수 걱정에 '병에 든 생수'를 따로 주문해야 하는 관광객들에게 식당 생수는 맥주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기호품'이 된다. 결국 물을 마시느니 맥주를 마시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 절로 나오며, "물보다 맥주가 싸다"는 말이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

평소 맥주보다는 위스키를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곳 프라하에서만큼은 가격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맥주의 매력을 실감하고 있다. 오늘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여행지를 둘러보던 중 목격한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여유롭게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식당 테라스에서 아침 식사(Breakfast) 메뉴를 차려놓고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커피 향이 나야 할 아침 식탁에 맥주 거품이 올라와 있는 풍경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침 햇살 아래 식당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와 함께 아침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 김종섭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벌건 대낮에도 술을 마시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이다. 물론 한국에서 아침에 마시는 술은 해장술이 되어 식당에서 가끔 목격이 된다. 하지만 해가 저물어야 술잔을 기울인다는 한국 특유의 술문화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침 밤낮 가릴 것 없이 식탁 위에 맥주가 올라와 있는 체코, 특히 프라하에서는 술을 마시는 시간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이곳은 맥주가 유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의 활력소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 또한 이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시간 구분 없이 체코 맥주를 만끽하고 있었다.

체코인들에게 맥주는 단순히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음료에 가까워 보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즐기는 프라하의 모습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이 이색적인 풍경은,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여행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다. 프라하의 아침은 그렇게 맥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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