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동학농민혁명, 조선의 심장부 경복궁이 점령당하다

이윤영 2024. 12. 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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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48]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갑오왜란·동학의병전쟁

[이윤영 기자]

▲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 1894년 6월 13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와카노우라 마루와 일본 혼성여단의 선발대대. 청군이 동학군 빔압을 구실삼아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은 그 다음날 제1군 사령부 및 제3사단 주력과 후속부대를 조선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청군을 물리친 뒤 동학군 소탕에 나섰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시작되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동학의병군 기포에 대해 우리는 분명 짚고 넘어갈 진실이 있다. 동학에 관심 있는 일부 인사들이 동학이 외세 즉 일본을 불러들였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조선정부에서 청군을 불러들였고, 일본군은 조선정부에서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불법으로 조선에 상륙하여 내정간섭은 물론 특히 조선 왕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을 병탄(倂呑) 즉 강점(强占)하려 했다.

일본의 이러한 계획은 갑오동학혁명 훨씬 이전부터 정한론이란 기획 아래 철저하고 완벽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러기에 동학이 일본을 불러들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역사 왜곡은 분명 사라져야 한다. 당시 이러한 국내외상황에서 동학혁명군은 동학의병군으로 기포하여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목표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 경복궁점령 일본기록화 1894년 6월 21일(양7.23) 일본군은 새벽 경복궁을 불법 기습 점령하였다. 조선 궁궐 침공은 일본 공사 오토리의 지휘 아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의 출동 명령에 의한 용산에 주둔해 있던 2개 연대가 동원되었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국의 훈령,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군의 경복궁(景福宮) 점령 사건은 당시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오토리 공사에게 본국의 훈령으로 조선 왕궁을 침범하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국의 훈령은 '첫째 군사를 출동시켜 경성의 대문들을 경비하고, 왕궁의 문을 지킨다. 둘째 군사력으로 문 안팎의 공간을 제압하여 지배력을 확보한다.'이다. 이는 한성과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하겠다는 의도로 일본 정부의 지시와 일본군의 군사행동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군 5사단 혼성여단 출동

1894년 6월 21일(양7.23) 자정 무렵이었다. 일본군의 궁궐 침공은 일본 공사 오토리의 지휘 아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의 출동 명령에 의한 용산에 주둔해 있던 2개 연대가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먼저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신을 끊어 청나라군의 통신망을 차단했다. 바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작전명 '조선 왕궁을 점령하라'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1호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작전1> 6월 21일(양7.23) 이른 아침 새벽 4시경 일본군 21연대가 경복궁 서쪽 영추문(迎秋門)에 도착하여 문을 박살내려고 폭약을 터트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관계로 진입은 실패하였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2호

(일본군 작전2> 영추문을 지키던 평양 기영병과 총격전 끝에 오전 5시경 일부는 조선군을 제압하고, 일부는 영추문을 도끼로 찍어내고, 일부는 사다리로 담을 넘고 또 일부는 동소문에 불을 지르고 침입하였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3호

<일본군 작전3> 궁내로 진입한 일본군은 광화문으로 진격하였다. 광화문을 수비하던 조선군 장위영 군사들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일본군의 또 다른 부대가 배후에서 공격하여 조선군은 쓰러지고 제압당했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4호

<일본군 작전4> 일본군이 동문인 건춘문으로 진격하여 교전이 시작되었으며, 여기서도 조선군은 산발적으로 저항하다가 제압당했다. 결국 일본군에 밀린 조선군의 후퇴로 궁궐의 모든 문들은 열리고 말았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5호

<일본군 작전5> 고종 국왕을 찾아내어 포로로 잡은 것이었다. 일본군은 옹화문 안쪽 함화당에 고종과 민왕후가 숨어있는 사실을 알아냈고 재빠른 수색을 시작했다. 일본군 제2대대장 야무구치 게이조 소좌를 비롯한 2대대 군사 일부가 옹화문 앞에 도착해 궁궐 호위병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켰으며, 결국 고종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신남영(新南營)에 있던 기영병(箕營兵) 등 잔여 관군들이 건춘문(建春門)으로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을 이어나갔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6호

<일본군의 작전6> 일본군은 조선군의 기영병 등의 항전을 끝내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내렸다. 오토리 공사의 지시로 일본군은 총칼로 고종을 협박하여 '함부로 움직이는 자는 목을 벤다.'는 어명을 내리게 했다.
고종은 순간 치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고종의 어명을 받은 안양수가 왕명을 전하자 기영병 등 조선군은 대성통곡하고 입었던 군복을 벗어 찢고, 총과 화포를 버리고 궁궐에서 모두 물러났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7호

<일본군 작전7> 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 지휘하에 일본군은 궁궐 수비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조선군이 저항할 수 없도록 고종을 어소(御所)에 감금시켰다. 또 조선의 모든 신하들이 경복궁에 출입하지 못하게 통제하였다.

일본군 작전명령 제8호

<일본군 작전8> 일본군은 왕궁 침입 작전이 시작된 지 다섯 시간 후 오전 9시경 경복궁을 완전 점령한 후 고종의 탈출을 막기 위해 궁궐을 겹겹이 에워쌌다. 또한 한성 성내의 군사 시설을 모두 점령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 조선의 심장부가 통째로 넘어가는 데 불과 다섯 시간,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작전이었다.
▲ 녹두꽃은 영원하리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점령 사건부터 청일전쟁, 동학의병전쟁 등을 가리켜 갑오왜란(甲午倭亂)이라 부른다. 이때 일본군에게 항전한 의병운동은 모두 항일독립운동에 해당된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즉 동학의병전쟁은 항일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다.
ⓒ 박홍규
일본군 작전명령 종결과 항일독립전쟁

경복궁이 완전 점령되고 고종이 포로로 잡힌 뒤부터 사실상 조선은 일본에게 외교권이 박탈된 것은 물론 국권마저 빼앗긴 병탄과 강점기 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점령 사건부터 청일전쟁, 동학의병전쟁 등을 가리켜 갑오왜란(甲午倭亂)이라 부른다. 이때 일본군에게 항전한 의병운동은 모두 항일독립운동에 해당된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즉 동학의병전쟁은 항일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다.

반민족 친일내각 구성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 국권침탈(國權侵奪)후 고종을 협박하여 친청파인 민씨 세력을 완전히 추방했다. 그러고는 운현궁에 몰려가 완강히 저항하는 대원군을 어명을 내세워 기어코 입궐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민심을 얻기 위해 왕명으로 죄가 가벼운 정치범을 석방하고 조선 정부의 요직 인사를 단행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총리대신 김홍집, 통위사 신정희, 총어사 판윤 이봉의, 장위사 좌윤 조의연, 좌포장 이원회, 우포장 안향수, 병판 김학진, 전라감사 박제순, 내무협판 김가진, 부승지 이원근, 내무참의 유길준·김하영·김학우 등이 중용되었다.

일본의 친청파 척결과 조선의 국권상실

일본 공사 오토리와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하여 대원군 이하응에게 정치 일체를 위임한다는 전교를 내리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숙적인 청나라를 견제하고 친청파들을 숙청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민왕후는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친청파의 핵심인 좌찬성 민영준, 전 통제사 민형식, 전 총제사 민응식 등은 유배시켜 버렸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조선 정부의 행정권과 인사권을 전횡(專橫)하였다.
▲ 동학무명농민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국왕 체포는 작전 개시 5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조선정부는 맥없이 항복하였고 백성들은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힐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위급상황에서 동학이 거세게 항쟁, 척왜창의 즉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으로 전국에서 기포한 것이다.
ⓒ 박홍규
일본의 거짓 선동과 짓밟히는 조선

그러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에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공식 입장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라고 국내외에 선전했다. 또한 '일본군이 왕궁 옆을 행군하고 있었는데, 왕궁의 조선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와 응전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또 일본군은 방어 차원에서 응전하다가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보호하게 되었으며, 이는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일관되게 거짓으로 변명하였다.

정부 대신 동학이 나라를 구제한다.

「일본에 의한 갑오왜란의 첫 번째 목표인 경복궁 점령과 국왕 체포는 작전 개시 5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한 나라가 무너지는데 이렇게 전광석화 같은 짧은 시간은 아마 세계 역사 이래로 처음 있는 사건일 것이다. 그만큼 조선왕조와 궁궐 수비의 허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조선정부는 맥없이 항복하였고 백성들은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힐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위급상황에서 동학이 거세게 항쟁, 척왜창의 즉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으로 전국에서 기포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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