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사람을 바꾼다”...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완역한 이 번역가의 말
번역으로 지새운 10년의 새벽 담겨

10년.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완역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간 번역가 김정아(57)의 세계는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로 가득찼다. 새벽 시간을 내어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붙들고 씨름했다. 미련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꿋꿋이 글을 옮겼다. 그렇게 지난해 7월까지 번역한 책의 분량이 약 4000쪽이었다.

김정아는 10대 때부터 ‘도스토옙스키 덕질’을 해 온 자타공인 ‘도 선생’ 전도사다. ‘도 선생’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를 부르는 그의 애칭. 『죄와 벌』에 매료돼 서울대 노문과를 갔다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러시아어 전문가가 됐다. 낮에는 패션회사 스페이스눌의 대표로 일하고, 새벽에는 번역하며 ‘도 선생’과 대화를 나눈다. ‘4대 장편’을 포함해 이제까지 새벽을 쪼개 번역한 도스토옙스키 책만 20여권에 달한다.

김정아는 말로만 하던 ‘전도’를 이제 책으로 한다. 지난 8일 ‘4대 장편’ 완역의 시간을 담은 에세이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샘터)를 출간했다. 10년의 시간을 글로 옮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주. 그는 ‘작가의 말’에 당초 “『도스토옙스키, 영혼으로의 여행』(가제)이라는 꽤 무겁고 진지하며 학구적인 책을 계약해 둔 상태”였지만 한 문학 담당 기자와의 식사를 통해 “지금 당장 누군가의 심장을 두드릴 수 있는 책이 더 먼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출간 계기를 밝혔다.
지난 10년은 김정아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완역 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스페이스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도 선생’ 얘기를 하는 그는 시종일관 들뜬 모습이었다.
Q : 1월 식사 이후로 4개월 만이다. 그새 에세이를 냈다.
A : “당시 식사를 하며 ‘학술서보다 에세이가 먼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준 말이 도화선이 됐다. 곧장 샘터 대표님께 전화했다. ‘할렐루야!’ 소리치며 바로 진행하자고 말해주셨다. 그후 코로나에 걸려 꼼짝없이 집에 있었다. 모든 약속을 비우고 머릿속에 글이 떠오를 때마다 썼더니 금방 탈고했다.”

Q : 지난해 7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마지막으로 ‘4대 장편’의 모든 번역본을 출간하지 않았나. 올해 1월엔 네 권을 하나의 책으로 묶은 ‘완역 합본판’을 냈다.
A : “번역하면서 보니 ‘4대 장편’이 하나의 이야기이고, 기승전결로 구성돼있더라.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하는 마지막 장면을 ‘부활’로 보자. 이후 『백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가까운 순수한 ‘구원자’ 미시킨 공작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백치’라고 부른다.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진 백지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인 『악령』의 세계다. 이후 도 선생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모두가 죽어나가는 파괴의 세계 후 부활의 여정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보면 하나의 책으로 엮는게 자연스럽다.”
Q : 대체 왜 이렇게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나.
A :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내 평생을 바친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파란만장한 여정을 살고 건져낸 보석 같은 진리가 연민, 사랑, 관용,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이다. 그의 메시지가 나를 키웠다.”
Q : ‘4대 장편’ 중 아끼는 문장 하나만 고른다면.
A : “내 내부에 존재하는 난폭할 정도로 광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질식시켜 버릴 만한 커다란 절망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져 보았지만, 번번이 그런 것은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냉철하고 비관적인 인물 이반이 하는 말이다. 도 선생은 사형 집행 직전 자신이 느낀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계속해서 얘기하는데, 이 문장도 그런 의미로 읽을 수 있다.”

Q : 도스토옙스키에 관해서라면 늘 단언한다. 번역에도 정답이 있기 때문일까?
A : “단언하는 이유는 내가 같은 작품을 다른 언어로 수십번 읽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10대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와 50대에 읽은 도스토옙스키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수가 많으니 해석도 좁혀질 뿐이다. 하지만 번역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내 번역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번역 보다는 가장 성실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Q : ‘4대 장편’ 번역을 한 10년의 시간이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A : “패션계에서 18년 있었다. 일하며 나 자신을 잃겠다 싶을 정도로 불안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도 선생의 따뜻한 문장들이 내 삶의 지침이 되어줬다. 이젠 어떤 상황에 놓여도 ‘나는 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고전은 사람을 바뀌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Q : 그간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
A : “나에게 러시아는 도 선생이 살아가던 19세기의 모습이었다. 번역을 할 때마다 당시 모습을 담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챙겨보는 루틴이 있을 정도다. 4대 장편 번역 중에도 비슷한 이유로 러시아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완역 이후 러시아 정부의 루스키 미르 재단 초청으로 처음 러시아에 갔다. 오는 6월에도 같은 재단의 ‘도스토옙스키 투어’ 초청으로 러시아에 가게 됐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Q : 상상하던 모습과 다를까 두렵지는 않나.
A : “너무 울까봐 두렵다. 도 선생이 괴로워하고, 위안을 얻고, 타인과 교감했던 모든 발걸음을 따라가게 됐다. 후손과도 만나는데, 도 선생과 비슷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Q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A : “너무 오랜 시간 장편 번역에 매달려 잠시 쉬려 한다. 아직 4대 장편의 전조가 되는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번역을 못 했다. 몇 년 쉰 이후에는 이 책을 번역하고 싶다. 그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에 입문할 수 있도록 그의 매력을 알리는 글들을 쓸 것이다.”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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