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회수 관련 쟁점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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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작권 환수 촉구 시위와 군인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회원들이 '건군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이 열리는 1일 오후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가행진 도중 벌어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배치된 군인들이 시위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
| ⓒ 권우성 |
전작권 문제는 이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측이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한국정부가 더 맡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형국이어서, 그 깊은 내막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대단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한 독립국가의 체면이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존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1950년 7월 25일 이승만.
전쟁 중에 군사력이 미약한 처지에서 일시적으로 전작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하는 것을 꼭 탓할 이유는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정부의 처사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미군에게 이양된 전작권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1954년 11월 17일 합의한 <합의의사록>에서 한국군 전작권을 유엔군 사령관이 계속 행사하도록 재확인되었다.
전작권 문제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이 진압 학살에 군대를 동원하면서 현안으로 제기되었다. 전작권을 갖고 있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 병력 차출과, 미국의 항공모함과 공중조기정보통제기를 배치한 사실이 알려지고, 이를 계기로 80년대 반미감정의 확산과 반미투쟁의 요인이 되면서 전작권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0년대 말 한·미간에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논의가 시작되어 노태우 정권이 1992년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및 군사위원회회의(MCM)에서 "한국군에 대한 평시작전통제권은 늦어도 1994년 말 이전까지 한국군에 전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1993년 한·미안보협의회의 군사위원회에서 환수 일자를 1994년 12월 1일로 합의한데 이어 실제로 이때에 실행되었다. 이로써 평시작전통제권은 44년 만에 한국군이 환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핵심인 전작권은 여전히 제외되었다.
민주정부가 수립되면서 전작권 환수문제는 다시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우리 국력이나 국방력, 국군의 사기와 전투력으로 보아 더 이상 전작권을 미군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북한의 핵실험과 연계되어 노무현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 속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전작권 환수시기를 2012년으로 정하고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런데 미국이 '2009년 전작권 이양'을 전격 제안하면서 한·미간에, 그보다 국내에서 또다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 문제가 외교적으로 제기되자 역대 국방장관 13명을 비롯하여 성우회(예비역 장성 모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재향군인회, 전직 고위 외교관, 일부 전직 경찰총수 등이 연명으로 환수반대 성명을 낸데 이어 일부는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족벌신문들이 이들을 부추기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국방력 강화와 국가안보의 실질적 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역대 국방장관과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시위에는 분노를 표시했다.
"자신들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했기에 해방 60년이 될 때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전작권을 외국군에게 맡기겠다는 말인가?"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이 전해지자 수구세력과 야당, 족벌신문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대통령을 공격하고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한·미 정부는 2007년 7월 전작권 환수 이행계획 로드맵에 합의하고, 새 작전계획 작성과 한·미군사협조본부(MCC) 창설을 준비하기로 했다. 2011 ~ 2012년에 각종 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독자적 전쟁수행 능력을 검증하고, 2012년 4월 17일 전작권을 환수, 한미연합사의 해체와 동시에 한국군 합동군사령부 및 미 통합군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원래 전작권 문제는 미국 측에서 2009년으로 조기 반환을 제기한 것을 노무현 정부가 2012년으로 연장시키려 한 것인데, 수구세력은 미국에는 침묵하면서 노무현 정부에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노무현에 이어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전작권환수와 관련 아무런 고민도, 대책도 보이지 않다가 환수시기를 2017년으로 다시 3년 7개월이나 연장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박근혜 정부는 수구세력의 여론을 좇아 2014년 10월 24일 다시 전작권 환수를 거의 무기한으로 연장하는 데 미국과 합의하였다. 외형상으로는 미국이 되돌려주겠다는 데도 한국 정부가 맡아달라고 애원하는 형국으로 전작권 환수 시기가 연장되었다.
2015년으로 못박은 전환시기를 구체적인 시한도 정하지 않은 채 다시 연기한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선거공약으로 "2015년 전작권 환수 이행"을 약속하고도,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기간'도 명시하지 않고 연기시켰다.
국방부는 전작권 시기를 못박지 않은 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라는 안보환경 때문" 이라는 설명을 댔다. 북한의 위협이 있는 한 영원히 '전환불가'의 입장을 보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망명정부를 운영하면서 대일항전을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제정하여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도록 조처했다. 어떤 나라이든 자국에서 타국이 비록 망명정부라 할지라도 군대를 조직하고 운영한다는 것을 쉽게 허용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결코 '9개준승'을 수용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은 얼마 안 되는 원조 때문에 "중국에 예속된다면 광복군은 도리어 우리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부끄러워했고, 군무부 차장 윤기섭은 '9개준승'을 받아들이면 "광복군은 중국의 노예군대"가 된다고 단언했다.
이 문제를 논의한 임시의정원에서 문일민 의원은 "이 자리에서 죽어도 또 다시 망국노 노릇은 못하겠다"고 격앙했고, 조완구 의원은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9개준승'의 폐기를 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협상하고 설득하여 '9개 준승'을 폐기하고 광복군의 독자적인 전작권을 회복하여 항일전을 벌였다. 남의 땅에서, 그 나라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랬다. 이재명 대통령이 재임 중 전작권 회복을 대직하여서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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