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홀린 제주의 뱀동굴…유령처럼 서있는 흰 얼룩 정체
제주도는 국내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 열리는 행사가 ‘세계유산축전 제주’다. 2020년부터 해마다 진행해 올해 다섯 번째 행사를 치렀다. 올 축전의 주제는 ‘발견의 기쁨’이다. “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알아내는 데 의미를 두었다”고 정도연 총감독은 설명했다. 올해 축전은 지난 11일 개막해 22일 막을 내렸다. 실제 체험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올해 축전을 돌아본다.
거문오름과 세계자연유산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은 알겠는데, 거문오름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거문오름이 있어, 나아가 거문오름이 낳은 용암동굴들이 있어 제주도는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다. 제주도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때 공식 이름을 아시는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다. ‘제주 화산섬’을 구성하는 유산이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 성산일출봉 일대고, ‘용암동굴’은 거문오름과 용암동굴계를 이른다. 제주도는 두 유산이 합쳐져 하나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는데, 하나가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이고 다른 하나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란 뜻이다. 거문오름과 거문오름이 낳은 동굴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가늠이 되실 테다.
거문오름은 고도 456m 면적 80만㎥의 큰 오름이다. 그러나 가치가 알려지기 전까지 거문오름은 제주 동부 중산간에 돋은 수다한 오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산방산이나 다랑쉬오름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지 못했다. 지역 주민도 거문오름의 진면목을 몰랐다. 거문오름이 자리한 조천읍 선흘리와 덕천리, 인근의 구좌읍 송당리에서도 거문오름은 땔감 줍고 고사리 꺾으러 가는 뒷산이었다.
거문오름이 주목받은 건, 사실 거문오름이 낳은 ‘자식들’ 덕분이다. 거문오름은 1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생성됐다. 거문오름이 분화하면서 제주도 동북쪽으로 용암이 흘러 월정리 해안까지 다양한 화산지형이 형성됐다. 그 화산지형 중 용암동굴도 있었다. 거문오름이 낳은 용암동굴은 20개가 넘는다고 알려졌다. 이들 동굴 중 8개가 세계적 수준의 경관적 가치와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 됐다. 거문오름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벵뒤굴,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이렇게 8개로, 만장굴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모든 동굴의 출입이 금지됐다. 자식들이 출세했으니 부모가 덕을 보는 건 당연한 이치. 거문오름도 제가 낳은 동굴들과 함께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자연유산센터가 거문오름 어귀에 건립된 이유다.
용암 길과 동굴 탐험
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치른 축전 행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12일 개막식 직후 열린 리셉션이었다. 이날 리셉션에 나온 음식을 이른바 ‘유산 마을’의 부녀회에서 준비했다. ‘유산 마을’은 유네스코 유산을 거느린 제주도의 7개 마을을 말한다. 조천읍 선흘1리와 선흘2리, 구좌읍 김녕리·월정리·행원리·덕천리, 그리고 성산읍 성산리. 성산리만 성산일출봉 마을이고, 나머지 6개 마을은 거문오름과 용암동굴계 마을이다. 세계자연유산센터가 선흘2리에 속한다.
이들 유산 마을에서 제 마을 특산품으로 음식을 만들어 개막식 손님을 대접했다. 올 축전에서 처음 시도된 마을 사업이다. 이를테면 선흘2리 부녀회는 마을의 자랑 거문오름을 빼닮은 ‘고사리카나페’를 만들었다. 고사리로 만든 장아찌와 제주 흑돼지를 사용했다. 당근이 유명한 월정리에서는 ‘월정당근밭담’이란 이름의 당근 튀김을, 해녀가 많은 김녕리에서는 해녀가 즐겨 먹는 톳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다. 선흘2리 고은숙(54) 부녀회장은 “마을마다 제 마을의 대표 음식을 정하고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고 뜻깊었다”고 말했다.
축전의 하이라이트 행사는 ‘위킹투어’와 ‘벵뒤굴&김녕굴 특별탐험대’였다. 워킹투어는 거문오름부터 월정리 해안까지 용암동굴 지역을 이은 4개 코스 전체 26.3㎞의 트레일을 걷는 체험이다. 평소에는 출입이 통제된 트레일로, 축전 기간에만 참가자에 한해 개방된다. 인적 끊긴 곶자왈과 중산간을 걷다 보니 태초의 제주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벵뒤굴&김녕굴 특별탐험대’는 거문오름이 낳은 용암동굴 중 2개 동굴을 특별 개방하는 행사다. 동굴 탐험도 사전신청한 참가자만 체험할 수 있다. 조동환(67) 세계자연유산 해설사와 함께 김녕굴을 탐험했다. 김녕굴은 압도적인 규모의 동굴이었다. 입구 쪽 동굴의 높이와 폭이 10m는 족히 넘었다. 조동환 해설사가 김녕굴에 얽힌 전설을 들려줬다.
“제주에서는 ‘사굴’ 그러니까 ‘뱀굴’이라고 불렀어요. 이 동굴에 큰 뱀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와요. 열다섯 살 소녀를 해마다 뱀에게 바쳤다는 얘기도 있어요. 동굴 벽을 보세요. 꼭 뱀 껍질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동굴이 끝나는 곳을 ‘뱀 꼬리’라고 불렀어요. 김녕굴이 통제된 건 얼마 안 됐어요. 내가 어렸을 땐 동굴로 소풍도 오고 했어요.”
안전모 쓰고 705m 길이의 동굴을 탐험하다가 벽에 새겨진 사람 모양의 흰색 얼룩을 발견했다. 조동환 해설사가 “박테리아가 굳어 얼룩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허옇게 빛나는 게 꼭 유령 같았다. 조동환 해설사도 “옛날에는 제의에 희생된 소녀들의 혼령이 벽에 새겨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털어놨다. 자연은 늘 신비하지만, 유네스코도 인정한 자연은 차라리 경이로웠다.
제주도=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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