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줄 서는 곳, 안동에서 찾아갔습니다

이호영 2024. 10. 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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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개관 기념전 '여세동보(與世同寶)'... 오는 12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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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기자]

새로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 기념전 '여세동보(與世同寶)'에 전시 중인 <훈민정음해례본>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제3 전시실에서 홀로 전시되고 있었다.

전체 33장인 해례본 가운데 펼쳐진 곳은 '용자례'. '용자례'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여섯째 장의 이름으로 "첫소리 'ㄱ'은 '감'과 같이 쓰고 시(柿,감)가 되고 ᄀᆞᆯ과 같이 쓰고 蘆(갈대)가 된다"라고 설명하는 등 각 소리의 실제 사용을 보기로 든 장이다.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
▲ 훈민정음해례본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 중인 훈민정음해례본
ⓒ 이호영
아시다시피 <훈민정음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안동 사람 이용준 씨가 그의 은사인 서울 김태준 교수에게 본가에 <훈민정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 교수는 이 해례본을 당시 중요 문화재를 수집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소개하고 이를 사들일 것을 권고했다. 간송 선생은 ' 훈민정음' 진본이 맞으면 자신이 반드시 사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하루빨리 서울로 가져오기를 종용했다고 한다.

김 교수가 당시 서울 한옥 1채 값인 천 원이면 살 수 있겠다고 가격을 제시했으나 간송은 <훈민정음> 책자가 맞으면 이는 합당한 가격이 아니라며 한옥 10채 값인 만 원과 함께 소개비 천 원을 합해 1만1000원이라는 거금을 책 가격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거래된 ' 훈민정음'은 고향 안동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됐고 간송은 책을 자신의 수장고에 감춰둔 것이 아니라 국어학자 등에게 연구하도록 하면서 이 책자가 <훈민정음해례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이 발견되면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운용법 등을 알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훈민정음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였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 책자의 발견에 따라 그 궁금증이 완전하게 해결된 것이다. 비록 판매라는 형식으로 고향 안동을 떠난 훈민정음해례본이 84년 만에 고향 가까이 왔다. 하지만 고향 안동은 갈 수 없다. <훈민정음해례본>을 보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안동에서 대구에 갔다.

"<훈민정음해례본>의 고향은 안동이란다. 1940년 안동을 떠난 이후 줄곧 서울 보화각에 머물렀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런 해례본이 84년 만에 드디어 안동과 멀지 않은 곳, 대구까지 왔는데 고향인 안동에서도 전시된다면 의미가 클 텐데."

<훈민정음해례본』> 실물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수년 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특별 전시회 때 처음 보았다. 그때 감흥이 고스란히 살아나면서 이번 대구에 이어 안동에서도 특별 전시되면 어떨까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안동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소원일 것이다.

몰입도 높은 <미인도> 전시
▲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실 입구 많은 시민들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이호영
이번 전시회에는 <훈민정음해례본>뿐만 아니라 신윤복 '미인도', '월하정인', 김홍도 '고사인물도'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40건 97점의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대구, 경북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관 입구서부터 미술관 각 전시실에는 줄을 서서 수십 분을 기다려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각 전시실에도 관람객이 너무 많아 작품을 온전하게 보기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된 작품 97점이 모두 보물이고 국보인 데다 교과서나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기에 관람객 대부분이 허투루 보지 않고 천천히 감상하고 있었다.

"지금 관람객이 워낙 많아서 제1 전시실부터 차례로 보기는 힘듭니다. 아래층 제4, 5전시실은 줄을 서지 않아도 되니 먼저 보시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맨 처음 제1 전시실을 뒤로 하고 우선 제일 아래층 제4, 5 전시실부터 찾았다. 그곳은 관람객이 적어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 직원 말에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그곳도 만원이다. 작품마다 줄 서야 하는데 다 작품 하나하나 제대로 살피기는 힘들었다.

제4전시실에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 미술, 도자기, 서예 작품이 걸렸다. 고려 시대 청자와 조선 시대 백자와 분청사기, 국보인 금동삼존불감과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묵란화첩 <난맹첩> 등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제5전시실은 간송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작품을 영상으로 구현한 '미디어아트' 실이다.
▲ 차호호공 추사 김정희가 예서로 쓴 글. 매화와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 이호영
제4, 5전시실에 이어 관람한 제2, 3전시실은 정말 특별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지만 제2전시실 신윤복의 '미인도'는 단아한 조선 여성의 모습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시실은 <훈민정음해례본> 전시처럼 온전히 신윤복의 '미인도'만 전시돼 있다. 어두운 조명과 기다란 복도를 따라 한 줄로 들어가야 해 신비감과 몰입도가 높다.
▲ 신윤복 '미인도' 대구간송미술관 제2 전시실에 전시 중인 신윤복의 '미인도'
ⓒ 이호영
200년 넘는 시간을 견디고도 완전하게 보존된 '미인도'는 마치 어제 그린 듯한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과서 등에서 눈으로 익혔으나 실물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고개를 살짝 숙인 듯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얼굴, 짧은 저고리에 넓은 치마를 입고, 저고리 고름을 섬섬옥수로 다소곳이 잡은 모습에서 조선 여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간송 전형필의 노력

'미인도' 작품 뒤편에는 신윤복의 다른 이름인 '신가권'의 도장이란 뜻인 '신가권인申可權印'과 신윤복의 자인 '시중時中' 등 작품 속에 찍힌 도장을 확대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 미인도에 찍힌 도장 신윤복의 다른 이름이 '신가권'이다. 도장은 '신가권인'과 그의 자인 '시중'으로 미인도 전시판 뒤에서 볼 수 있다.
ⓒ 이호영
제1전시실은 여전히 많은 관람객으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신윤복의 ' 월하정인' ' 단오풍경' 등 다양한 작품과 김홍도의 ' 고사인물도', 김득신의 ' 야묘도추' 등 당대 유명한 화가들의 풍속도를 가까이 감상할 수 있다.
▲ 신윤복 '월하정인' 깊은 밤에 선비와 규수가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 이호영
▲ 김홍도 '마상청앵도' 말을 타고 가다 물 오른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 노래 소리 들은 듯하다.
ⓒ 이호영
▲ 김득신 '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는 장면을 그렸다.
ⓒ 이호영
그리고 제1전시실 맞은편에 전시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일대기는 그가 우리 문화유산을 얼마나 사랑하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막대한 돈과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지역에서 서울에 가지 않고도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쉽지 않다. 대구 간송미술관 ' 여세동보' 특별 전시회는 오는 12월 1일까지 계속된다. 이 기회에 대구·경북 사람들은 처음으로 지방에 나들이한 <훈민정음해례본> 등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여유를 가져보기를 기대한다.
▲ 간송 전형필 일대기 간송 전형필 선생의 우리 문화유산 사랑과 이를 보존하기 위한 활약기가 실려있다.
ⓒ 이호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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